이사했습니다.
특영 텐카시문/시문텐카 위주로 돌아가는 티스토리 : http://astorrr.tistory.com/
옛날 텐시/시텐 연성들 : http://tensi.postype.com/
옛날 특영 그림/감상 블로그 : http://blog.naver.com/sleep_less
@astor19k
이사했습니다.
특영 텐카시문/시문텐카 위주로 돌아가는 티스토리 : http://astorrr.tistory.com/
옛날 텐시/시텐 연성들 : http://tensi.postype.com/
옛날 특영 그림/감상 블로그 : http://blog.naver.com/sleep_less
@astor19k
비터 발렌타인 5편
본래 비좁은 방인 데다 협탁이며 책상, 의자까지 나뒹굴며 알맞게 발치에 걸리적거리는 탓에 어차피 서로 간에 움직일 수 있는 범위와 동작이란 뻔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맞지도 않는 몸을 입고 뻣뻣하게 움직이는 주경준보다는 텐카 쪽이 약간 우위에 선 셈이다. 거대한 검을 휘두를 공간을 만드는 게 쉽지만은 않았지만. 벽과 천정에서 수많은 부적이 파르륵 떨었다. 칼날이 허공을 베고 푸른 빛이 얽혔다가는 마찰음과 함께 떨어졌다. 짧고 격한 마주침 끝에 주경준이 손을 크게 내뻗었다.
텐카의 머리를 노리고 가늘고 날카로운 전뇌가 떨어졌다. 그를 피해 몸을 뒤로 물리는 동시에, 텐카는 자신이 박차고 들어왔던 방문 바깥으로 뛰었고 어깨부터 바닥을 굴렀다. 곧바로 퉁겨 일어나자마자 한결 여유로워진 거실 공간에서 밑으로부터 위로 끌어올리듯 검날을 베어올렸다. 쉭 하는 가늘고 시린 소리, 어둠이 달의 흉처럼 갈라져나가며 붉은 빛이 쏘아져 나갔다. 아직 시문이 못 빠져나온 좁은 침실을 향해 불꽃의 해일이 소용돌이치며 밀려나갔다. 컴컴한 방 안쪽에서 솟구치는 빛, 바닥이 드드드득 떨리는 약한 진동과 함께 붕괴음이 들렸다. 어둠이 터져나갔다. 일순 텐카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검을 내휘두른 자세 그대로 크게 치켜뜬 눈을 정면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부적의 결계와 영파가 부딪쳐 만들어낸 희부연 안개가 흘러다녔다. 얼어붙은 듯한 냉기가 퍼졌다. 그 틈을 뚫고, 침실 너머 어둠 속에 푸르스름한 빛이 파스락, 라이터 불빛처럼 작게 솟았다. 서서히 사람의 형체가 문 사이로 나타났다. 가느스름한 전뇌를 손 주변에 두른 채 주경준의, 시문의 모습이 걸어나오고 있다. 검은 머리와 무리진 백발이 헝클어지고 얼굴에 핏자국이 말라붙은 채로.
그가 표정없이 텐카를 내려다보았다. 한겹 막이라도 씌운 듯 낯선 붉은 기가 감도는 시문의 두 눈이 갑자기 슥 웃었다. 입가는 또다시 깔보듯 음험한 인상으로 일그러졌다. 텐카 역시 마주 웃었다. 멀쩡한 모습을 확인하자 겨우 안도한 듯, 한편으로는 또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그가 다시 몸을 한껏 낮춰 검을 쥐고는 중얼거렸다.
"웃지 마, 졍들어."
기분 더럽다는 의미였다. 아주 많이. 여유 부릴 틈 따위는 없었다. 주경준은 조금씩 살아있는 인간의 몸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이보다 더 자유롭게 장악하게 된다면 자신의 승산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게 되면 시문의 빙의 상태를 풀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사람.... 아니, 텐카는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다. 결코 '그녀'의 힘을 빌릴 수는 없다. 시문의 과거를 알면서 접근해 온 여자, 침묵하고 있던 여자. 결코 그 여자를 신뢰할 수는 없다. 텐카는 입을 꽉 틀어다문 채 그녀의 가능성을 아예 머릿속에 지워없앴다. 벼랑을 등진 것처럼 정신을 집중했다. 기회는 한번이다.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간 시문의 몸이 흔들거리며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텐카는 칼끝까지 숨을 조절하며 전신을 곤두세워 거리를 가늠했다. 그리고 순간, 놓치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몸 전체로 끌어올리듯, 검을 반원으로 휘둘렀다. 쏘아져나간 붉은 불길이 허공에서 푸른 전격과 맞부딪쳐 거대한 울림을 내뿜었다. 잠시 그에 정신을 빼앗긴 주경준은 팔을 들어 반동에 맞섰다. 옷자락이 어지럽게 들어올려져 나부끼고 이시문의 마른 장신이 뒤로 무게중심을 두어 꼿꼿하게 버텨냈다. 문득 주경준은 눈앞의 텐카가 있어야 할 위치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사각인 옆에서부터 치고 들어오는 그림자를 보았다.
"놀아볼카." 밤의 짐승처럼 새까만 음영 속에 붉은 두 눈만이 번득이고 있었다. 은백색 칼날을 타고 불길이 내달려왔다.
분명 그 움직임으로는 이번 공격을 피할 수 없다. 불길이 화염의 고리처럼 번져왔으나, 그자는 우두커니 선 채 시문의 눈으로 흘긋 올려다 볼 뿐이었다. 도저히 피할 구석이 없다. 이제 끝났다, 고 텐카는 오래 단련해 온 자신의 감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 무방비로 서 있던 시문의 손가락 끝이 까딱 움직였다.
갑자기 텐카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번득 비치는 푸른 빛과, 등줄기를 훑는 저릿한 한기를 동시에 느꼈다. 공중에서 공격하느라 마찬가지로 무방비인 그의 등뒤에서 커다란 전뇌와 빛의 덩어리가 벼락처럼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텐카의 눈이 경악으로 굳었다. 빠르다. 시문이 평소 다루던 것에 비해 비교할 수도 없이 조작이 능하다.
더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쾅, 눈앞이 푸르게 물들고, 등을 강타하는 충격과 함께 텐카는 거대한 손에 내팽개쳐지듯 바닥으로 던져졌다. 칼을 놓친 채 팔이 꺾이며 온몸이 엉망으로 구르고 쓸려, 가재도구 사이로 쳐박혔다. 동시에 시문의 몸도 텐카가 쏜 붉은 영파에 휩싸여 뒤로 나뒹굴었다. 요란한 소리와 튀어오르는 붉고 푸른 빛의 파편.
그리고 잠시 후, 정적과 더불어 어둠이 돌아왔다. 고요하고 물처럼 가라앉은 자리에 달빛이 다시 괴괴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유리조각이 깔리고 탁자와 소파가 밀린 가운데 죽은 듯 엎드려 있던 텐카의 어깨가 약간 움직였다. 막혀있던 숨이 터져나왔다. 그는 꿈틀거리며 몸을 뒤챘고, 잠시 누워있다가 남은 힘을 쥐어짜 일어나 앉았다. 팔뚝부터 허벅지까지 유리와 플라스틱 파편에 긁혀 옷 위로 피얼룩이 점점이 배어나오고 얼굴도 쓸려서 엉망이지만, 어떻든 간에 살아있긴 했다. 그는 짜증나는 듯한 신음을 길게 흘리며 벽에 뒷머리를 기댔다. 그 작자는? 제대로 뜨이지도 않는 눈을 들어 바라보자, 거실 저편에서 그도 소리없이 천천히 일어서는 중이었다.
셔츠 끝이 너덜너덜해진 채 이시문의 등이 꼿꼿이 섰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꺾어 조금도 변화없는 얼굴로, 완전한 주경준도 완전한 이시문도 아닌 해쓱한 무표정으로 텐카를 돌아보았다. 쳇 하고 텐카는 혀를 찼다. 손바닥으로 문질러 눈안에 흘러든 피를 닦아냈다. 이제 좀 시야가 또렷하게 보인다. 그리고 시문이 고요하게 조금 기울어진 듯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걸 쳐다보았다.
문득 그 발치에 무언가가 카랑 하고 걸렸다. 텐카의 검이었다. 맥동치듯 붉은 용의 영파를 내뿜으며 시문의 발 근처에 뒹굴고 있었다. 텐카는 자꾸 흐려지는 시야를 유지하려 애쓰며, 시문이 허리를 굽혀 검을 집어드는 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문의 손길이 닿자마자 해무리처럼 일렁거리던 불꽃의 영파는 순식간에 빨려들듯 사그라지고 다시 용이 휘감은 장식이 달린 싸늘한 검으로 돌아갔다.
시문은 그대로 검을 들어 반원을 그리듯 텐카 쪽으로 휘둘렀다. 가볍게 허공을 베며 미끄러진 검끝이 텐카의 목에 와 닿았다. 그 싸늘한 촉감에 더해 피부 한겹이 슬쩍 베어져나가는 선득한 감각이 더했다. 시문은 거기서 정지했다. 텐카 본인조차 가끔 버거운 무게였는 데도, 시문은 등을 편 채 아무 무게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으로 한손에 쥔 검을 곧게 내뻗고 있었다. 흐르듯이 어깨에서부터 허리, 다리, 균형을 잡기 위해 약간 뒤로 물린 한쪽 발목까지 이어지는 선 자체도 한 자루의 잘 벼린 검 같다고, 텐카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잡념을 품었다. 그는 픽 웃었다. 눈을 내리깔며 내뱉었다.
"칼, 잘못 쥐어써. 손 방향이 반대쟈나."
물론 상대가 고맙다고 검을 제대로 고쳐쥘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게 망령을 자극하긴 한 듯, 반응이 왔다. 시문의 몸이 허리를 틀어 검을 놀리자, 어둠 속에 쉭 소리를 내며 은백색 궤적이 그려졌다. 텐카의 복부를 가볍게 일직선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눈을 찌푸리며 긁힌 곳을 눌렀다. 시문은 입을 열지도 않은 채로 주경준의 목소리만 거칠거리며 들려왔다.
'조금만... 더 밀어붙였으면 성공했을 텐데. 계속 공격에 망설임이 생기더군. 애썼는데 아깝게 됐다.'
"아, 들켜쏘? 칭챤해줄게. 아죠씨야말로 훈늉하세여. 싀문씌도 못 다루는 피카츄 능룍 아주 잘 쓰먹던데?"
'자기 잠재능력을 제대로 쓸 줄 모르더군. 상관없다. 어차피 저승 가면 쓸 필요도 없는 능력이지.'
텐카가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이번엔 진짜 베겠다는 양 다시 칼끝이 목줄기로 들이밀어 왔다. 달빛을 받아 깎아낸 듯 흐르는 시문의 윤곽. 길게 번득이는 검 너머로 시문의 풀어진 채 크게 열린 동공이 텐카를 마주하고 있었다. 텐카의 눈앞에서 시문의 다른 한 손이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손 사이로 스피릿이 소용돌이치며 모이기 시작했다. 빛나는 푸른 전격의 덩어리가 강렬하게, 타오르듯 맺혔다. 텐카의 등이 튕기듯 꼿꼿해졌다.
그 상태 그대로 주경준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텐카에게 공격을 가하는 대신, 그 손을 그대로 자신 쪽으로 돌렸다. 시문의 헤쳐진 옷깃 새 드러난 가슴 윗부분과 목 사이로 향했다. 둥글게 모았던 손가락을 펼치는 동시에 샛푸른 빛덩어리가 이시문의 몸에서 터져나갔고, 그의 머리 전체를 삼켜버렸다.
번쩍, 빛과 굉음. 총이라도 맞은 듯 시문의 상체 전체가 뒤로 크게 젖혀지고 다리가 꺾였다. 텐카의 두 눈이 핏기를 품고 크게 벌어졌다. 반사적으로 뛰쳐나갈 듯 전신이 긴장을 머금어 딱딱하게 곤두섰다.
영원 같은 몇 초가 흘렀다. 시문의 몸은 휘청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차츰차츰, 다시 균형을 잡으며 상체가 끈으로 조종당하듯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머리, 얼굴이. 그다지 타격받지 않은 듯한 머리가 마지막으로 앞으로 숙여오며 텅 빈 눈을 텐카에게 맞췄다. 텐카는 얼어붙었던 심호흡을 내터뜨리며 뒤로 털썩 기댔다.
"카... 캄착이야. 아죠씨, 나 진차 캄놀했쟈나. 그츰으로 싀문씌가 당할 리 업찌만 정말 촐았다그."
'어째서?'
주경준이 무감각하게 중얼거렸다. 시문의 잠재된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힘은 시문 본인에게는 듣지 않았고, 오히려 신체는 더 다루기 어려워졌다. 아니, 방금 전 타격으로 도리어 시문의 의식을 일깨우기라도 했는지 안에서 밀어내는 반발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주경준은 남은 힘을 다 해 다시금 검을 텐카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등뒤로는 손을 뻗어 베란다로 향하는 유리문을 밀어열었다.
'방법은 많다. 여기서 추락하면 이 몸뚱이는 어떻게 될까. 불에 태우거나 물에 빠뜨리거나 질식시키면? 이 칼로 벨 수도 있지. 이 몸도 인간인 이상....'
"해 볼 테묜 해 바."
묘하게 침착을 되찾은 어투로 텐카가 내뱉었다. 그는 장단이라도 맞추듯 고갯짓을 까딱거리며 덧붙였다. "저기 가스도 이꼬, 욕실도 빌려줄케. 불 부쳐 줄카? 목 매달료묜 넥타이도 차자줄케. 섹쉬하겠네. 근데 아죠씨... 그런다고 그가 호랑호락 당할 줄 알아여?"
킬킬거리는 웃음이 퍼졌다. 갑자기 그 웃음이 그치더니 붉게 치켜오른 눈이 번득 날을 세웠다.
"네놈은 아직도 이시문을 몰라."
분개한 주경준이 떨치듯 전뇌의 스피릿을 내리꽂았다. 펑 터지는 푸른 빛에 얻어맞고 텐카는 다시 벽에 쳐박혔다가 나무토막처럼 옆으로 고꾸라졌다. 단번에 숨통을 끊을 작정이었는데 확실히 위력이 줄었다.
'건방지게....' 시문의 얼굴로 주경준은 눈을 한껏 부릅 뜬 채 손을 들여다보았다. 텐카의 도발을 받아 그런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초조감이 주경준을 휩쌌다.
'방해하지 마라!'
붉게 물든 망령의 눈에 발작 같은 분노와 적대감이 어렸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이 몸을 융합할 필요가 있다. 잠시라도 좋으니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지배하기만 하면 된다. 혼란에 빠진 채 주경준은 시문의 내면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더 아래, 더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더 깊은 곳의 이시문에 접촉하고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
그자가 자신의 의식을 접고 시문의 안쪽으로 후퇴하자 주변에 떠돌던 전뇌의 스피릿이 꺼져들었다. 깜박이는 부적의 희부연 노란 빛만 남긴 채 주변에 어둠이 밀려들어 시문을 에워쌌고, 허공을 부유하듯 그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줄이 풀린 인형처럼. 고개가 뒤로 힘없이 늘어지더니, 이윽고 눈이 감겼다. 마침내 걸려들었다, 라고 텐카는 직감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힘껏 내밀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
"일어나, 싀문씌!"
그 고함이 시문 안에 잠든 종을 울렸을 지도 모른다. 깊은 심연 속으로 침입을 시도하던 망령은 거미줄에 걸린 듯 덜컥 사로잡히고 말았다. 텐카의 두 눈에 시문의 어깨가 크게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와 함께 망령이 쇠를 긁는 것처럼 분노에 찬 소리를 지르는 것도.
'<i>......!</i>' 갑자기 그의 전신이 싸늘한 월광 같은 푸른 빛에 에워싸여 빛나기 시작했다. 시동하듯, 늘어져있던 시문의 손가락 끝 하나하나가 힘을 되찾으며 하나씩 구부러 들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듯 그의 옷자락이 일순 위로 펄럭이며 날렸다. 짧은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쓸며 여기저기 나부꼈다. 여전히 그의 입술이 굳게 닫힌 채였으나 텐카의 귀에는 잡아찢는 듯 망령이 부르짖는 외침이 쩡하니 울렸다. 유리창이 드득거리며 떨었다.
마침내 감겨있던 시문의 눈이 열렸다. 그 유빙 같은 동공 깊은 곳에서부터 푸르스름한 광채가 폭발하듯 넘쳐났다. 번쩍, 하고 이윽고 온 집안을 휩쓸어버릴 듯한 빛의 광풍. 텐카는 고개를 돌리며 눈앞이 멀어버릴 것 같은 그 섬광을 피했다.
온통 푸르게, 물들었다. 그가 돌아오는 각성의 빛.
덜덜대던 유리의 진동이 멎었다. 빛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텐카는 눈을 뜨자마자, 무릎으로 기다시피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팔을 벌렸다. 그리고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는 시문의 몸을 때맞춰 두 팔 안에 받아안았다. 체중이 쏠리며 몸이 한쪽으로 기울고 두 사람의 팔다리가 얽히고 나뒹굴면서도 끝까지, 텐카는 그를 놓지 않고 어깨를 굽혀 한껏 감쌌다.
억눌렀던 거센 호흡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돌아오라 부르는 소리. 그의 숨결, 부둥켜 끌어안은 팔을 느낀 시문이 유리알처럼 멍하니 허공에 고정시키고 있던 눈을 돌렸다. 그리고서야 천천히, 매우 목이 마른 듯한 목소리를 냈다.
"텐카씨...?"
텐카는 확실히 그 음성을 알아들었다. 갑자기 맥이 빠져서 그래서 대답 대신 웃기 시작했다. 이시문이 맞다. 그와 함께 나란히 앉아 끊겨버린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침묵하고 싸고 쓴 와인을 나눠마시던 그였다. 아주 속을 다 비워내겠다는 듯이, 쉬어터진 소리로 웃고 또 웃으며 시문에게 두른 팔에 힘을 줬다.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뭐라 말하려다 말고, 시문은 그를 그저 그렇게 내버려두었다. 마비된 것처럼 감각이 없는 손을 올려, 머뭇거리듯 텐카의 붉은 머리카락 사이에 넣고 쓸었을 뿐.
안개가 끼어 흐릿하던 의식이 돌아오며 주경준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몇가지 토막난 영상이 기억 속에 확 되살아났다. 마치, 악의와 살기로 뭉친 흉측한 덩어리가 되어 깊은 어둠 속에서 그자를 잡아찢고 태워없앤 것 같은 기분. 시문은 흠칫하여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실 한구석에 새까만 악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텐카씨." 좀전과는 다른 어조로, 경고하듯 텐카를 불렀고 그 덩어리를 쏘아보았다.
최후의 힘을 다해 그 덩어리는 매우 희미하고 불투명한 사람 그림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음울하고 나이 들고 지쳐보이는 주경준이 어둠으로부터 일어나 섰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공허하고 컴컴하게 뚫린 두 눈. 그는 망자의 눈으로 한참이고 시문과 텐카를 먹먹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안에 든 게... 대체 뭐냐.'
시문은 경계 태세로 상체를 폈다. 그동안 텐카는 팔을 뻗어 바닥에 구르던 자신의 검에 손끝을 걸었다. 그러나 이미 주경준은 발치에서부터 연기처럼 부서져나가는 중이었고, 형체와 함께 힘과 의지마저 잃고 있었다. 거역할 수 없는 소멸이 그를 부르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꺾이지 않는 시선으로 시문을 똑바로 쳐다보는 채였다.
'어두운 구멍... 너무 짙은 어둠. 너무 많고, 너무 오래 되고, 너무 지독한 것들. 그것들은 뭐지.... 대체 네놈은 뭐길래 그런 걸 품고 있지...?'
혼잣말 하다 말고 그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생각할 힘마저 사라지는 듯 그 냉소하는 움직임은 희미했다.
'아니.... 내가 아니어도 언젠간 네놈 스스로 먹고 먹힐 것이다. 네 적은 네 안에....... 오래지 않아.... 그러니 먼저 저승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우리 둘다 좋은 곳에선 못 만나겠지만....'
텐카의 눈가가 꿈틀하며, 끝장을 내려는 듯 검자루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시문은 그를 가로막아 만류했다. 대신 시문은 휘청거리면서도 제대로 일어나 섰다. 고개를 반듯이 세우고는, 손을 들어올려 깎은 듯이 경찰식 경례를 보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최후의 배웅은 해야 할 것만 같았기에. 그를 돌아보는 주경준은 이미 눈코입도 분간이 안 될 만큼 어둠으로 녹아내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문의 경례에 조금 어이가 없는 듯이 코웃음치는 모습에서, 시문은 아주 잠깐 그의 원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마지막 자존심인지 내뱉는 그의 마지막 한 마디가 또렷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간다, 이시문 후배.'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그는 거침없이 똑바로 걸어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계속 부스러지던 그의 먼지 같은 잔재가 쿵 하고 닫힌 현관문 너머로 끊기고, 잠시 그 자리에서 맴돌다가 바스락 하고 휘날렸다. 시문은 계속 눈으로 그의 자취를 좇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사로잡았을 때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죽은 사람 특유의 미련으로 가득 차 어둡고 컴컴하고 추운 감각들. 그 와중에도 단 두가지 영상만은 또렷이 지금까지 뇌리에 새겨진 채였다.
한 남자가 보인다. 그는 허름한 요양원 침대에 누워있다. 바싹 마른 채, 양볼은 홀쭉하고 꺼칠해져서는 호흡기를 코에 끼우고 있다. 불규칙하게 부풀다 가라앉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남자가 끝까지 가슴에 품고 있던 모습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 촘촘하고 따스하고 기분좋게 내리쬐는 빛 속에서 밀짚모자를 쓴 한 여인이 돌아보고 있었다. 단지 그것 뿐. 흰 원피스 자락을 날리며 말도 없이 웃는 여인의 모습 뿐.
결이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햇빛과 갈색으로 어우러지며 그녀는 입모양만으로 뭐라고 말했고, 곧 수줍은 듯 웃으며 멀어지기 시작했다. 한순간 확 다가들었다 다시 가 버리는 그녀는 추억 속에서 너무도 아름다워서. 아주 짧은 순간에도 애틋함으로 가득 차서. 자신도 모르게 불렀다. <i>나현아.</i>
시문은 숨을 삼켰다.
바닥에서부터 부드러운 재처럼 검은 기운이 불어 오르더니 시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어두운 기운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변해 시문의 눈동자로 빨려들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갔구나. 시문은 일순 흠칫하며 몸서리쳤다. 손으로 막듯이 자신의 눈을 가리고 덮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텐카의 팔이 뒤에서 뻗어와, 눈을 가린 채 약하게 이를 악무는 시문을 감싸안았다. 마침내 그의 어깨가 포기하듯 늘어지고, 손가락 틈새로 그 푸른 눈이 이미 부서져버린 망령을, 그자의 삶과 기억을 모두 집어삼킬 때까지.
"싀문씌."
낮게 불러보았다. 이 악몽 같은 밤에서 처음으로 반응이 돌아왔다. 시문은 아주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눈가로부터 손을 끌어내렸지만 여전히 시선은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다. 텐카는 억지로 그 얼굴을 잡아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머리카락 새로 벌어진 두 눈은 평소보다 더 금속적인 푸른색으로 형형하게 물들어 소름끼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구잡이로 부서지고 깨지고 어질러진 집안, 새벽 직전의 가장 짙은 어둠이 거실을 점령하고 있었고 달빛은 너무 약한데 새벽은 멀었다. 피범벅이 된 얼굴과 머리카락, 생채기 나고 잡아뜯긴 몸의 상처와 말라가는 피얼룩과 비린내는 별 것 아니다. 자고나면 잊어버리는 시시한 악몽 같은 거다. 먼저 입을 연 건 시문 쪽이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텐카씨."
"알아."
"그렇다고 잊을 순 없죠. 몰랐다면 변명이지만 이제 알게 된 이상. 짊어지고 살아갈 겁니다. 평생. "
"알아."
알아. 텐카의 팔이 시문의 뒷목덜미를 받치듯 끌어당겨 고개를 가까이 가져갔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상대를 원해 가볍게 맞닿았다 떨어졌다. 몇번을 그렇게 호흡을 확인하고 체온을 전하고 전해받으며, 아침을 피해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처럼 입술을 맞댔다. 그러다 말고 서로의 엉망진창인 몰골을 다시금 확인하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문이 자조하는 투로 내뱉었다.
"피냄새 나는 발렌타인이네요."
"원내 성순교일이니카 피냄새 나는 게 당욘한 거야."
마치 붉은 귀신들 같다. 손을 내려 시문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텐카가 한참만에 억누른 소리로 속삭였다.
"...만져도 대...?"
시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손으로 자신과 닮은, 자신과 닮은 붉은 귀신의 얼굴을 감싸 가까이 가져왔고 입술을 포갰을 뿐이다. 혀가 파고들어 닫혀있던 입술 깊은 안쪽에서 따뜻하게 섞였다. 혀끝에서 부드럽고 애틋한 불꽃이 일었다.
-- ..........쓰다가 중간에 생각났는데 영파가 아니라 스피릿이란 용어가 있다는 걸 자꾸 까먹어요orz
-- 그냥 시문에게 저 용돌돌 칼 들려주고 싶어서 이따위 복잡한 상황이 됐다는 건 비밀.
-- 허락 받지 못 해서 그간 건드리지도 못 한 고자 멍게씨....
-- 다음 완결편은 포스타입으로 옮겼습니다. http://tensi.postype.com/
-- 이후 이야기도 포스타입에 전연령 버전으로 공개할 예정입니다.
-- 종종 특영 잡담 올릴 트위터 : @astor19k
-- 특영 위주 네이버 블로그 : http://blog.naver.com/sleep_less
비터 발렌타인 4편
'힘드냐, 신참?'
부르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어올리고서야 시문은 자신이 보고서를 작성하다 말고 졸고 있던 걸 깨달았다. 팔꿈치 밑에서 서류가 구겨지고 손은 펜을 쥔 채 비뚤어진 선을 죽 긋고 있던 중이었다.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삐끗하기 직전에 깨워준 모양이다. 시문은 슥슥 눈가를 부빈 후 다시 허리를 폈다.
'아뇨. 그냥 좀 며칠 피곤이 쌓였나 봅니다.'
'쉬엄쉬엄 해라. 새빠지게 일하고 뼈를 묻어도 아무도 안 알아준다.'
싸구려 캔커피를 불쑥 내미는 그의 옆모습은 오랜 형사 생활로 다져진 듯 쓸데없는 여분의 표정 하나 없이 굳고 울퉁불퉁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그야말로 형사 그 자체인 인물로 보였다. 늘 말수도 적고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으며 그저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하는, 오히려 인간관계를 험하게 다루는 면이 있어 보여서 가까이 하기 힘든 인상이었다. 시문도 신참으로 들어와 6개월 가량 이리저리 구르고 부대끼면서도 정작 이 선배와는 거의 말을 섞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먼저 말을 걸고 캔커피까지 건네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시문은 조금 어색하게 커피를 받아들며 자기가 생각해도 붙임성없이 인사했다.
'네. 감사합니다.'
'너무 초반에 힘 뺄 필요 없어. 지금이야 멋모르고 힘도 넘치고 사명감이니 정의니 그런 게 자랑 같아서 무리하지만 나중엔 남는 거 하나 없단 소리다.'
저는 딱히 그런 것 없습니다 라고 불쑥 나올 뻔했으나 한참 선배에게 말대꾸하는 식이 될까봐 적당히 네 하고 받아주며 캔커피를 마셨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시문을 한참이나, 불쾌감이 느껴지진 않지만 뭔가 뜯어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며칠 수염을 안 깎은 턱을 문지르며 혼잣말로 생각을 정리하는 양 중얼거렸다.
'하긴, 너처럼 희한하게 생겨먹은 녀석이 오히려 적성일 지도 모르지. 천직인 줄 알고 미련하게 파던 나보다는.'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후줄근한 양복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시문에게서 멀어져 가며 역시 생각의 연장처럼 영문 모를 소리를 뇌까렸다. '음악 학원.... 나 같은 놈은 무리지. 그렇지.' 시문은 의아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은 캔커피를 홀짝거렸다.
그게 주경준이라는 이름의 고참 형사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눈 사적인 대화였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 후, 한동안 나이 든 형사들 사이에서는 주경준이 임채환의 범행을 사전에 들어 알고 있던 게 아니냐는 수근거림이 흘러다녔다. 소문이라는 게 늘 그렇듯 거품처럼 부풀어 올랐다가는 흔적없이 허무하게 꺼져갔다. 그리고 시문은 그 후로 아주 오래, 그 대화를 잊었고 의식적으로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시문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디선가 잘 살고 있으리라 마음 한구석에선 믿고 있었지만 결국은, 세상을 떴구나. 스산하고 고통받는 악령의 모습으로 이렇게 마주하고 보자 불현듯 그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공기가 차갑다. 주경준이 마비된 듯한 어조로 반복했다.
- 생각해 냈어.
망령이 되어서도 아직 대화할 만한 이성은 남아있는 듯하다. 반사적으로 머리로 판단하자마자 시문은 입안 가득 감도는 쓴맛에 어금니를 약하게 깨물었다. 그래도 한솥 밥을 먹는 동료이자 선배였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두고 악령화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그것부터 머릿속에 계산하고 있던 자신에게 넌더리가 났으나 지금 눈앞의 현실이 또 그렇다. 그는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자고 찾아온 게 아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며 시문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절제하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잊겠습니까."
짤막한 대답을 듣자 그자의 입매가 비뚤게 일그러졌다. 마음에 들었는지 혹은 비위에 거슬렸는지. 그 표정은 놀랍게도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에게도 속을 열지 않고, 내려다보는 눈을 한 형사 주경준. 그러나 친구에게 잘못된 식으로 의리를 지키고, 충격으로 정신을 놓았다는 여자에게 돌아간 주경준.
행방을 감춘 채 죽고나자, 모든 원점이 된 이시문을 찾아온 망령 주경준. 이상하게도 이렇게 되고나서야 시문은 주경준이란 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봤자 늦었다. 너무 늦은 이야기다. 차가운 공기가 등골까지 저리게 했다. 창문 너머 활처럼 휜 달빛이 냉정하게 눈가를 찔렀다. 내쉬는 숨결이 무게없이 흩어져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빚을 갚으러 오신 겁니까."
스산한 죽음의 냄새. 마른 꽃보다는 썩어가는 연못에 가까운 냄새였다. 망자는 여전히 굳은 턱 위로 비뚤어진 역한 웃음을 머금고는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 하고 짧게 뱉는 음색에 서서히 자근자근 씹는 듯한 분노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 죽어가면서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망자가 위험한 건 일직선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고, 예전에 소피아가 말한 적이 있었다. 힘든 사건 후, 본인은 다 잊고 용서하고 치유했다고 생각해도 그건 이성이 눈속임 한 거죠. 버티기 힘든 상처 앞에 진통제를 놓을 뿐이예요. 미처 없앨 수 없던 원한과 분노와 고통은 죽기 전 망자의 사고 속에서 터져나오고, 오래 억압했던 만큼 몇배로 무섭도록 부풀어 올라요. 안 그래도 사람은 죽으면서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하게 되고 생전 못 이룬 소망 따위에 집착하기 마련인데. 더불어 타인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 증폭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녀는 딱 하고 손가락을 울렸다. 경쾌한 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비정하리만큼 진지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악령이죠. 우리의 목표이자 싸워야 할 대상이기도 하고요.
크게 시문은 심호흡을 했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있는 건 없다. 되돌리겠다는 자체가 단지 집착이고 미련일 뿐. 숨을 쉴 때마다 바늘로 찌르듯 약하고 차가운 통증이 느껴졌다. 시문은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탓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주경준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리더니 주름을 잡으며 이지러졌다. 마치 비웃음처럼.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검붉은 불길을 받아 그는 초라한 잡귀신에서 점차 더 크고 강력한 존재로 자라나는 것만 같았다. 달빛이 새카맣게 먹혀들고, 손가락 끝이 저릿거린다. 그러나 시문은 가슴 속에 가시처럼 박혀있던 말을 끝까지 내뱉었다.
"주선배는 임채환을 막고 싶었겠지만 방법이 잘못 됐습니다. 당신은 잘못 된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마치 도미노처럼."
무엇이 투철한 형사였던 그의 눈을 가렸나. 안나현에 대한 오랜 연정? 그에서 비롯된 죄책감? 우정을 배신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 족쇄를 채운 임채환과의 관계? 그래서 임채환을 미리 말릴 수 없었고, 혼자 감당하며 혼자 몸을 던져 그를 막아내려 발버둥 쳤을 지도 모른다. 시문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를 비난할 자격이 없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시문 또한 자기자신의 생명에 책임이 있고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스스로를 포기하거나 저버리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것이 그가 그 사건 후로 비난과 고통 속에 내린 유일하고도 쓰라린 결정이었다. 그는 낮게, 속삭임보다 더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므로 선배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지금은. 전 그런 식으로 용서를 구하진 않을 겁니다."
주경준은 이제 꿈틀거리며 목을 뒤틀고 있었다. 얼굴이 괴이한 형태로 변해가며, 흙색으로 변해있던 팔에서 힘줄이 툭툭 튀듯 불거져 나오더니, 인간으로 보기 힘들 각도로 고개가 좌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올 것이 왔다. 시문은 가만히 올려다보며 아프도록 손을 움켜쥐었다.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자제력조차 잃어버린 주경준이 길게 찢어진 입으로 고함을 토해냈다. 두 팔이 사신의 낫처럼 기괴한 형체로 꺾이더니 위로 한껏 치켜 올라갔다. 그것이 자신을 향해 내리쳐오는 걸 끝까지 주시하며 시문은 두 팔을 앞으로 돌려 막았다. 정신을 집중해, 자신 안에 잠든 푸른 뇌전의 힘을 끌어냈다.
뇌전을 방패 삼아 자신을 감싸자마자, 눈앞으로 휙 하고 공간이 날카롭게 갈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폭죽이 터진 것처럼 시야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바람에 휩쓸린 나무토막처럼 시문은 뒤로 덜컥 날려갔다. 손 한번 못 써 본 채 무력하게 벽에 등과 뒷통수를 부딪치고, '윽' 하고 작은 소리를 흘리며 몸을 곤두세웠다. 욱신거리는 둔통이 등허리를 타고 삽시간에 뻗어갔다. 벽에서부터 죽 미끄러지듯 무너져 주저앉자, 망령의 팔이 다시 뻗어와 시문의 목을 움켜쥐었다.
딱딱한 껍질처럼 변한 손톱이 쥐어짜듯 목줄기를 파고들었다. 목이 졸린 채 시문의 몸은 인형처럼 서서히 들어올려 허공에 멈췄다. 좁아든 목 안쪽이 타는 것 같고 북소리처럼 쿵쾅거리는 맥박의 소음이 몇 겹으로 겹치고 퍼지며 관자놀이를 때렸다. 머릿속까지 터뜨릴 듯 목을 쥐어뜯으며 파들어오는 감각이 끔찍했다. "으...." 저절로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주경준은 실소하는 것 같았다. 비인간적으로 뻥 뚫린 시커먼 눈구멍. 악령. <i>키키키 키익-</i> 쇠가 긁히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그자의 목구멍에서 웃음처럼 터져나왔다.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시문의 목을 단번에 내리치려 했다. 목이 잘려나가기 직전 시문의 눈이 광채를 품고 새파랗게 번득였다.
'정신차려라, 이시문. 죽기 싫으면.' 온 힘을 끌어모은 그의 손아귀 안에서 빛이 솟아올랐다. 서로를 노린 공격은 허공에서 부딪쳤다. 시문의 손과 망령의 날 사이에서 묵직하게 어둑한 빛과 진동이 터져나가더니 시문의 몸이 또다시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 졌다. 스탠드와 원형 탁자가 시문의 몸뚱이와 함께 넘어가자 와장창 하고 요란한 소음이 일었다.
책상과 침대 사이 좁은 공간에 있는 대로 쳐박히며 이마와 팔다리가 심하게 긁혔다. 얼굴을 타고 뜨겁고 끈적이는 피가 흘러내려도 아랑곳않고, 시문은 목을 감싸며 속이 뒤집힌 듯 기침을 했다. 목구멍이 화끈거리며 벗겨진 곳에 피멍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멍청하니 머뭇거릴 틈 따위는 없었다. 시문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소리도 없이 닥쳐온 그자의 그림자. 사신의 낫처럼, 사마귀의 앞발처럼 거대하게 기형적으로 팽창한 팔과 손이 다시 시문을 향해 내리찍어 오고 있었다. 피할 여유도 공간도 없다. 욱신거리는 손목을 들어 앞을 가리면서도 시문은 늦었다, 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눈앞을 스쳐가는 얼굴은, 다른 누구도 아닌-
- 닮아가나 보네
불꽃 같은 눈으로 감추듯 웃는, 낯익은 이방인의 얼굴. 시문은 팔을 들어올리며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텐카씨.
갑자기 눈앞이 번득였다.
망령의 공격이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듯 꼼짝달싹 못 한 채 허공에서 막혔다. 그자의 손아귀 근처로 쩌적 쩌적하고 얼음이 깨지기라도 하듯 희미한 빛줄기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빛줄기는 거미줄 마냥 공기 중을 가로세로 빠르게 가로지르며 벽으로 천정으로 바닥으로, 그리고 시문을 중심으로 퍼져가더니 점차점차 하나의 거대한 금색 빛덩어리가 되어 모이기 시작했다. 시문은 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놀란 듯 고개를 쳐들었다.
부적이다. 십수 개는 될 듯한 노란 부적이 벽과 바닥에서 덕지덕지 붙은 채 강풍을 만난 듯 파르르 떨며 빛을 내뿜고 있었다. '부적? 저런 게 대체 언제?' 순식간에 머릿속에 스쳐간 의문을 곱씹어 볼 틈도 없었다. 망령은 고함을 내지르며 그 한가운데 걸려 몸을 이리저리 꺾고 있었다. 퍼석 하고 시문의 귀에 뭔가가 작게 부서지거나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번쩍, 노란 금빛으로 눈앞이 터져나갔다. 책상에 놓아뒀던 유리컵이 깨져 파편이 날리고 눈앞을 막은 시문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뒤흔들렸다. 창문이 드드드득 떨었다. 망령의 찢어지는 듯한 기이한 괴성이 고막을 먹먹하게 때렸다.
미처 그 빛이 어둠으로 사그라들기도 전에 방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박차고 들어온 텐카가 몸을 날리며 옆구리 근처에서 움켜쥔 검으로 오른손을 가져갔다. 넘실거리는 노란 불빛을 머금고 두 눈이 깊은 안쪽으로부터 예리한 살기를 뿜어올리고 있었다.
"Showtime!"
칼집에서부터 뽑혀나온 칼날이 으르렁거리는 용의 형상을 새기며 예리하게 허공을 베었다. 얼어붙을 듯한 냉기와 춤추는 칼날이 쏘는 열기가 맞부딪쳤다. 두 동강 날 만큼 깊게 잘린 망령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부적이 내뿜던 빛이 깜박거리며 천천히 꺼져들기 시작했다. 방안에 차분한 어둠이 되돌아오며 텐카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칼을 뿌려 아래로 드리우고는 우뚝 섰다. 구겨져 박힌 망령은 엉망진창이 된 방 한가운데서 바닥을 긁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텐카는 무표정하게 그 몰골을 내려다보더니 발로 그 시커먼 덩어리를 짓밟았다.
"꺼저."
시문은 벽에 등을 대고는 겨우 균형을 가늠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망령을 밟고 선 채 자신을 돌아보는 텐카와 시선을 맞췄다. "이...." 다물었던 입이 천천히 벌어지며, 버럭 고함부터 질렀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인간아!"
"엥?"
황당한 듯 눈을 치뜨다가 밑에서 몸을 뒤트는 망령 탓에 꼴사납게 뒤로 넘어가려다 겨우 버티고 서서 한번 더 망령을 밟아주고는 텐카는 '에엥?'하며 매우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머가요!"
"이 부적들요! 대체 이런 건 언제 붙여놓은 겁니까? 누가 멋대로 하랬어요. 이 인간이 진짜. 내 문제라고 일부러 안 끌어들이려고 했더니 미성년자까지 끌고 들어온 거예요?"
"흥, 그러니카 누가 혼자 맘대로 나 버리고 지방 가람니카! 텐카씨 삐져씀."
답잖게 야근했다고 새벽에 들어오는 꼴이 수상하다 했다. 시문이 자릴 비운 동안 멋대로 강바람군을 집에 끌고 와서 밑작업 다 끝마치고 그제야 남은 업무 후다닥 해치우고 왔던 거다. 본래대로라면 텐카 성격에 자기가 들어오기 전에 카세트와 워크맨을 몰래 처분하고도 남았을 텐데, 술과 초콜렛에 취한 채 방심해서 의심 못 한 게 탈이었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이글거리며 노려보는 시문 앞에서 텐카가 입을 삐죽거렸다.
"맨날 나만 미오해. 칭챤은 못 해 줄 망죵. 머찌게 등쟝해쓰니 뽀뽀 해 줄 줄 알아떠니 구박만 함니다."
"구박 안 하게 생겼습니까? 나중에 알아서 다 치워놓으시죠. 아니면 월급 감봉 당하고 시말서 폭탄 맞을 각오 하시던가."
"우와, 독재! 폭쿤! 멉니카! 기컷 두분이 알아서 잘 대화 나누시라고 방해 안 하고 기둘렸능데. 이웃집 토토로...가 아니라 두분 치고받고 대화가 굑해져도 이웃분들 피해 안 가라고 방음 부적카지 칼아주는 센스 있는 서비스 했는데!"
"아, 그러셨어요? 그 부적들 꽤 비쌀 것 같네요. 다음달 텐카씨 월급에서 까서 성황당에 지급해 드릴 테니 그리 아시죠."
억울함에 복받쳐 뭔가 더 말하려다 말고, 이제 익살은 충분했다 생각했는지 텐카는 대신 시커먼 개나 고양이처럼 웅크린 망령을 그저 한번 더 발로 찼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할까 라고 묻는 듯 시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시문은 눈짓으로 비켜주라고 신호했다. 텐카가 곧바로 뒤로 물러서자, 시문은 아직 욱신거리는 등뼈와 목의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무릎을 굽혀 주경준을 향해 몸을 굽혔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선배."
단말마의 고통처럼 꿈틀거리며, 망자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양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일그러진 얼굴은 악령화가 심하게 진행되어 이제 주경준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형상을 하고 있었다. 시문은 숨을 눌러참듯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제 가세요. 편해져도 됩니다."
할 만큼 했다는 말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몫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죽어서도 이렇게 과거의 과오를 되돌리려 몸부림치는 그를 위해서도 위안은 필요할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위로나 포용에 서투르던 자신이 어째서 살아서 상처입고 죽어서라도 보상받으려 몸부림치는 영혼들의 응어리를 들어주고 천도하는 역을 맡게 됐는지. 그러나 지금만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최대한 담담하게 다시 말했다.
"이제 가세요."
흡뜬 채 굳어가는 그 눈을 감겨주기라도 할 듯 시문의 손이 그 위로 다가갔다. 텐카가 튕기듯 어깨를 빳빳이 세웠다. "건드리지 마, 싀문...!" 시문의 손이 닿는 순간, 시커멓게 꺼져가던 그 뻥 뚫린 두 눈에 번득이는 생기가 스쳤다. <i>키이익-</i> 기분나쁜 쇳소리와 함께 망령의 두 팔이 뻗어와 또다시 시문의 목을 졸랐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텐카는 분명히 보았다. 망령이 검고 지저분한 안개처럼 흩어지며 시문의 목을 움켜쥔 손을 통해 스며들고 있는 것을. 그자는 시문에게 침투를, 정확히 말해서는 빙의를 시도하고 있었다. 텐카가 고함치며 늘어뜨렸던 칼을 다시 쳐 올렸다. 귓가까지 소름 끼칠 정도로 날카롭게 그어 내달리는 백색 칼날.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의 검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고 이제 망령의 모습은 찾을 수조차 없는데 시문은 두 팔을 떨어뜨린 채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싀문씌!"
텐카가 소리치자 급격히 시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나무로 된 꼭두각시의 줄을 거칠게 당긴 것처럼 그의 몸이 덜그럭거리며 앉은 자세에서 비정상적으로 일어나 섰다. 까딱이며 돌리는 얼굴 위에서 두 눈이 차츰차츰 붉게 물들었고, 육안으로 텐카의 존재를 확인한 듯 시선이 고정되었다. 열린 입이 갈라진 바람 소리를 내쉬다가 이윽고 주경준의 음성을 냈다.
'혼자서는, 못 간다.'
텐카의 부릅 뜬 눈이 바늘 끝처럼 굳어갔다. 살아있는 몸이 신기한 듯 팔목도 흔들어보고 다친 이마를 만져보기도 하더니 시문은 갑자기 쓱 웃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입가를 비뚤게 일그러뜨린 주경준의 웃음 그대로. 텐카는 등줄기를 스치고 오르는 오한에 이를 악문 채 몸을 떨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 형체를 갖추는 분노에 입술만 겨우 움직여 내뱉었다.
"나와."
거기서 나오라고, 이 새끼야! 고함을 지르며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주경준은 한 발 뒤로 멈칫하더니 무의식중에 손을 앞으로 내밀었고, 저절로 그 안에 푸른 빛이 서리며 그대로 텐카를 내리쳤다. 파직거리며 뻗어가는 뇌전이 텐카를 휩싸며 격한 물결처럼 그를 벽으로 내다 꽂았다. 쿵, 벽과 천장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고 텐카는 전신을 뒤흔드는 충격에 상체를 틀었다. 큭 하고 신음이 터져나오며 의식이 훅 꺼져갔다 간신히 돌아왔다. 엎어진 채 무거운 고개를 쳐들자,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시문의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자는 재미있다는 양 손을 앞뒤로 뒤집으며 중얼거렸다.
'보통 놈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대단한 힘이군. 괴물이 따로 없어.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이놈부터 쏴 버릴걸.'
텐카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경련을 일으키는 몸을 추슬러 칼을 짚고 어떻게 버티며 일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곧게 뻗은 검날을 치켜세웠다. 주경준은 빤히 그를 쳐다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더 입가를 일그러뜨려 경멸하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베려고? 이시문의 몸까지?'
"어이, 아죠씨. 이몸 특기가 칼로 썰어보리는 것 푼이라 착가카묜 섭한데. 갠히 귀신 잡는 특수반인 줄 알오? 칼은 거들 푼, 귀신 잡는 영파 졍도는 이몸도 쓸 수 있다는 소리다!"
검을 등뒤로 크게 돌린 후, 심호흡하고 텐카는 있는 힘을 다 해 모았던 기를 휘둘렀다. 금색으로 번득이는 붉은 불길이 태워버릴 듯한 기세로 포효를 내지르며 밀려나갔다. 주경준은 자기도 모르게 방어하듯 눈앞을 가로막았고, 시문의 양팔이 투둑거리며 갈라져 나갔다. 버티려 했으나 몸뚱이가 밀려나가 벽에 등이 막히고 말았다. 텐카가 히죽거렸다. 입가를 치켜 이성을 잃은 듯한 웃음을 그렸다.
"그럼 가 볼카, 2라운드."
-- 본격_부부_싸움.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