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터 발렌타인 3편.
어렵사리 시문에게서 받아냈던 현관 키로 문을 열고 들어서다 말고 텐카는 멈춰섰다. 아무도 없으리라 여긴 집안에 부엌 조명이 밝혀져 있었던 탓이다. 노르스름한 불빛이 좁고 짧은 복도까지 백묵으로 그린 듯 옅게 흘러넘쳐 있었다. 텐카는 길죽한 눈을 치뜬 채, 손바닥으로 받치고 있던 현관문을 부러 험하게 놓아 쿵 닫히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막 들어온 마냥 구두를 덜그럭거리며 벗고 부산을 떨어 인기척을 만들어냈다.
"어~ 피곤하다. 텐카씌 오늘 야근 힘내씀니다. 밤장님이 도망가소 혼쟈 좝일해씀니다. 우리 밤장님 탱탱이 대장... 어어라?"
그는 부엌 쪽으로 불쑥 머리를 디밀고는 말꼬리를 올렸다.
"머야, 싀문씨. 지베 있어쏘? 조기 멀리카지 가따온다고 해소 내일 오는 줄 아라찌. 가떤 일 잘 대씀니카? 나픈놈 자바다 족쳐슴니카?"
시문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채 텐카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단촐한 테이블 위에 싸구려 와인병이 나와있고 벌써 반쯤 비어있는 광경에 텐카는 약간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 그가 제대로 옷을 갈아입었고 아직 머리가 덜 말라있으니 제대로 씻기도 했다는 것까지 눈으로 확인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곁으로 다가왔다. 기계적이나마 제대로 일상 사이클에 맞춰 작동하고 있다면 됐다. 시문이란 인간은 아직 괜찮은 거다. 그는 컵에 약간 남아있던 와인을 멋대로 쭉 들이키고는 평소대로 웃는 표정을 만들었다.
"보아하니 잘 안 댔그만요. 머 어떠슴니카. 살다보면 이론 일 조론 일 있는 거지. 촘 기다료. 가치 마셔줄 사람 피료하지?"
그는 코트를 벗기 전에 습관적으로 주머니 안에 든 것들을 끄집어냈다. 열쇠, 쓸데없는 영수증, 사탕봉지, 그리고 성가시다는 듯 한 웅큼 꺼내놓는 초콜렛. 상자는 버리고 속 알맹이만 주워담았는지 온갖 포장에 온갖 상표 초콜렛이 고급 수제 트러플부터 봉봉, 스퀘어, 프랄린, 초코바까지 죄 뒤섞여 테이블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시문의 눈꺼풀이 들어올려졌다. 표정없이 비어버린 컵 바닥만 응시하던 그가 그제야 텐카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이게 다 뭡니까?"
"앙, 보믄 모름니카. 단 검니다, 단 거. 머 내가 단 거 달고 다니는 거 한두 번 밨나."
시문은 잠깐 생각을 더듬었다. 비슷한 광경을 최근에도 본 것 같은데. 그러고보니 어제 아침 식탁도 텐카가 차린다고 차린 게 시리얼과 초콜렛 한 움큼이었지. 그때는 무슨 애 같은 장난인가 했는데. 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푹 찌르듯 한마디 던졌다.
"...발렌타인이라서가 아니고?"
그 자리에서 굳은 듯 텐카가 멈춰섰다. 끼기긱 기름칠 안 한 기계 소리라도 날 것처럼 얼어붙은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며 질린 눈으로 시문을 쳐다보았다. 정곡을 찔려도 너무 스트레이트로 찔렸다. 답잖게 버벅거리는 말을 던지긴 했으나 영 수습이 힘들어 보이긴 했다.
"모, 모야. 싀문씨가 그런 것도 알오? 바픈 횽사님이 'Valentinstag'도 알고 세상 말세임니다?"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받아친 건 시문 쪽이었다. 눈을 크게 뜨며 정말 아무런 악의도 없이 두번째 스트라이크를 던졌다.
"어쩌다 알았는데 왜요? 하긴, 텐카씨야 가게마다 산처럼 초콜렛을 쌓아놨으니 지나갈 때마다 하나씩 사 모았겠죠. 안 봐도 뻔하네요. 좋겠어요, 단 것들이 많아서."
그냥 너님한테는 '초콜렛이 길거리에 산처럼 쌓여있는 데이'라는 의미였냐! 가여울 만큼 축 쳐진 텐카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문은 그 많고 많은 상표와 종류조차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제일 가까이 있는 걸로 하나 집어들었다. "저녁 걸렀는데 좀 먹어도 돼죠?"
"네, 네. 너 맘대로 하세여. 밤장님인데 머." 전투불능 상태로 비척비척 옷 갈아입으러 기어가다 말고 텐카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는-먹을-만-하네'라는 표정으로 상상도 못할 고가의 파베 초콜렛을 깨물어먹은 후 다음엔 뭘 먹을까하고 그나마 먼지만큼의 관심을 갖고 고르는 시문을 돌아보았다. 텐카의 표정이 차츰 웃음기를 담았다. 늘상 짓던 만들어붙인 가면 같은 얼굴이 아닌 눈 안쪽에서 잠시 피어오르다 스러지는. 그는 일부러 놀리듯 의자 등받이에 손을 짚으며 시문의 어깨에 닿을 만큼 깊이허리를 수그렸다.
"머야, 싀문씌. 이젠 촤컬릿 잘 먹네. 전에는 달다고 실오하더니."
시문은 특별한 대꾸 없이 그저 힐긋 눈끝을 들어 텐카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렌지 리큐르가 들어간 마지판을(본인은 뭔지도 모르고 골랐겠지만) 천천히 골라 입에 넣더니,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러는 텐카씨는, 전보다 옷차림이 수수해졌네요."
그리고 혀를 내밀어 무심하게 손가락 끝을 핥았다. 텐카는 갈색 뿔테 안경과 코트 아래 입고 있던 진회색 니트와 많이 겸손해진 송치 벨트와 순은제 버클과 그 이상으로 평범한 양장 바지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입맛이 단지 쓴지 알 수 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시문의 곁을 벗어나려던 생각을 접고 식탁 의자를 끌어와 가까이 앉았다. 시문이 늘 피우던 흔한 담배 연기처럼 두서없고 잡기 힘든 음성이 흘러나왔다.
"가치 살다보니 닮아가나 보네."
초콜렛을 하나 더 고르다 말고 시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귀에 익은 말이다. 누가 또 그런 소리를 했나 싶었는데, 운전하며 고강도와 통화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i>어쩌다보니 계속 가까이 지내고, 그러면서 닮는 모양이네요.</i> 두 사람이 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또 어쩐지 우스워 시문은 입꼬리만 움직여 픽 웃었다.
텐카는 삼분지 일 조금 넘게 남은 와인을 가늠해보고서 또다시 삼분지 일을 나눠 시문의 빈 컵에 흘려냈다. "싀문씌는 마니 마셨으니카." 남은 건 병 째로 주둥이에 입을 대고 크게 한 모금.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의미없이 바라보다가 시문은 등받이에 깊숙이 기댔다. 그가 앞서 텐카가 한 말들을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긍정이라는 걸, 텐카는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서로 알면서도 물어보고 알면서도 대답 않고, 그게 편안해서 함께 할 수 있는 상대란 드물다. 애초부터 모나고 뾰족한 구석조차도 한쌍의 톱니바퀴처럼 딱 맞아들어가는 상대를 만났다는 드문 우연이 곧 위험을 의미한다는 것도 두 사람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로 경계하고 의심하면서도 놓지 못한 채 이렇게 젖어들고 물들고 닮아가면서, 새벽 두시에 껌벅거리는 초라한 보조등 아래 함께 시간을 보낸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싸구려 와인과 주머니에서 쏟아낸 초콜렛을 나눠먹고 마시고 침묵을 살에 나눠 품고 있다.
"피곤하지 아나?"
시문이 손바닥으로 눈가를 문지르는 걸 보고 문득 텐카가 물었다. 시문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오래 운전을 해서 그런지 오히려 잠이 안 오네요."
"그래서 혼자 마시고 있던 검니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는 않았다. 묻는다 해도 시문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일을 표현하는 타입이 아니라 돌려말할 테고, 텐카 역시 옆에서 보아 눈치와 짐작으로 대충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고, 질문의 타이밍을 망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으니까. 과거의 잔재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었던 간에 그냥 이렇게 돌아왔으면 된 거다. 무사히. 텐카가 다시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자신의 컵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문이 정말 툭 내던지듯 입을 열었다.
"그래요. 당신이 내 꿈에서 읽은 게 맞습니다. 그게 전부죠."
역시 알고 있었나. 텐카는 와인병 주둥이를 손끝으로 돌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만들었다. 특별히 티를 낸 적도 없고, 간단히 언급했을 뿐인데 시문은 잊지 않고 안에 담아둔 채 자신의 행동과 말을 해석하는 기준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텐카 쪽에서 시문을 낱낱이 읽어내려 관찰할 때 시문도 거울의 건너편에 있는 것처럼 똑같이 자신의 일그러진 반쪽처럼 그를 보았다는 의미다.
"모 대단한 능룍도 아니야. 애가...가 아니라 외가 촉 힘이라는데 난 반촉차리 욜등한 모지리라 잘 모르게쏘. 그냥 칼이나 휘두르는게 더 편할 푼이고."
"결국 당신도 특영반 답군요. 이상한 사람들의 모임이니까 딱 적당해요."
상관없어요, 라고 시문은 컵에 입술을 대며 반복했다. 부외자들, 보여선 안 될 것들이 보이고,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고, 들어선 안 될 것들이 들리는데 정작 들어야 할 건 들을 수 없는 부적격 종자들. 발 닿는 곳 없이 떠돌고 있다. 잠시 등을 맞댔다가는 곧 다시 흩어져 사라져야 한다. 떠도는 유령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병을 들어 시문의 잔과 맞부딪치고, 그 가벼운 행위와는 달리 허공을 쏘아보는 듯한 메마른 눈을 한 채 텐카는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 해 봐쏘?" 망령을 보는 푸른 눈의 남자와, 꿈을 읽고 해하는 이방인 남자. 텐카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좀더 평봄하게... 남들 같은 삶이 당신이나 내게도 있었을 찌 모른다고."
시문은 묵묵히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초콜렛 포장지가 덧없이 등불 아래서 색바랜 금빛 은빛으로 타들어가는 듯했다.
"수마는 갈림길 너머 어딘가에는 그런 선택찌도 있었을 수 있다고. 다만 우리가 보지 모타고 지나쳤을 푼. 너무 가늘고 조븐 길이라."
"평범한 삶...이라."
피식 웃듯 겨우 움직인 시문의 어깨에서 그림자가 떨어져 바닥의 어둠과 뒤엉켰다. 가늘고 좁은 길, 샛길이라. 한때는 그런 걸 믿었던 적도 있다. 자신은 단지 길을 잘못 들었을 뿐 곧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최후의 최후까지 서투르게나마 끈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그때 그 한방의 총성으로 깨달았다. 그런 믿음이 얼마나 어설프고 부질없었는지. 자신은 이런 나쁜 씨로 애초부터 결정되었을 뿐이라는 자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무르고 알량한 껍질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부터. 태어나면서부터? 아니면 좀더 자란 후?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아니면 그 후? 자신이 알던 자상한 할머니가 어쩌면 진짜 모습이 아니었을 지 모른다고 자각한 후부터?
몇번 째인지 모를 청문회에는 이제 사람이 사람 얼굴이 아닌 그저 눈코입의 집합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차가운 시선이나 낮은 욕설은 이제 부호에 불과했다. 짙은 남색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등을 꼿꼿이 세워 앉은 채, 이시문 형사는 처음과도 같이 마지막까지 증언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같은 상황이 와도 저는 똑같은 행동을 할 겁니다. 몇번이라도. 안 그랬으면 인질들과 주형사가, 나아가 동료 형사 경관들도 죽었을 테니까요. 아니, 제가 죽었을 겁니다.'
부정하지 말자. 남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 모든 결정은 오로지 자신이 살기 위해서였다.
평범한 삶, 그렇다면 이게 자신이 선택한 평범이다.
"텐카씨. 그렇지 않아요." 시문은 신중하게 말을 골라 한 마디씩 끊어서 대답했다.
"확실히는 몰라도 내게 그 길은 애초부터 없었고 봐도 가까이 갈 수 없었고 나중에는 아주 끊겼으니까요. 벼랑으로 변해버렸어요. 텐카씨, 당신은 늦지 않았을 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언제든지 당신 눈앞에 그 샛길이 보인다면, 그때는 주저말고 돌아서서 가요."
갑자기 텐카가 테이블을 덜컹 밀었다. 동시에 소리도 없이 일어섰다. 전등갓이 흔들리고, 길죽하게 뻗은 그림자에 묻힌 창백한 광대뼈 위에 붉은 눈이 초승달처럼 냉랭한 빛만 뿜었다. 그가 억양없이, 나쁜 농담처럼 말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시문은 자신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 너머 그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텐카는 하얗고 마른 손을 내리더니 시문의 어깨를 짚고 고개를 수그렸다. 띄엄띄엄, 시문의 귓가에 그 낮게 곤두선 음성이 들렸다. 사실은 거짓말을 했어, 라고.
"바이올린 소리, 나도 캐큿하지 않아. 밀수입, 무기라던가 약 태문에 사람 뭉갤 태마다 음악을 틀었지. 비명이 안 들리게. 푸주칸에 음악 틀어노틋이. 바이올린 콘체르토. 파가니니 브람스 바흐 모짜르트... 사람 푼만 아니라 음악도 망가트렸다. 셀 수도 없는 유산을."
그의 마른 입술이 다가왔으나 그저 시문의 귓가와 머리카락 끝만 겨우 스치곤, 피하듯 멀어져 갈 뿐이었다. 그런 것도 입맞춤이라면 충분하다. 아릿한 취기, 뜨겁고도 차가운 닿지 않은 입맞춤. 시문은 눈을 감은 채 그 모든 걸 받아들였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이군요. 우린 닮았어요."
이제는 그 꿈이 반복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단지 좀더 집요하고, 세밀해졌을 뿐이다. 직접 겪었던 당시조차 경황이 없어 깨닫지 못했던 것들, 이를테면 그때 피냄새를 싣고 끈적거리며 얼굴에 들러붙던 바람, 긴장되어 굳은 팔근육에 조여들던 양복 소매통, 눈동자가 바싹 말라 따갑던 것까지. 식은땀은 나지 않고 체온도 제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머리가 핑 돌 지경인데 입은 굳게 다물려 열리지가 않아서. 위아래로 돌처럼 딱 달라붙어서. 호흡이 불편했다. 소리도 없는 심장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뛰고 있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피투성이의 검붉은 그림자가 일어섰다. 출혈을 일으키는 옆구리를 움켜쥐고도 그의 두 눈은 충혈된 채 형형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자는 피얼룩 진 바닥을 건너 휘청휘청 다가오더니, 시문의 양옆을 에워싼 동료 형사와 경관들을 떠밀쳤다. 권총을 넘기고 무방비 상태인 시문을 향해 주먹이 날아들었다. 피할 틈도 없었을 뿐더러 피할 생각도 사실 없었던 것 같다. 악을 다한 주먹을 맞는 순간 어금니부터 골까지 흔들렸다. 다물려있던 입이 겨우 벌어지며 응어리처럼 뭉쳐있던 숨을 토해놓을 수 있었다. 간신히 균형을 잃지 않고 버텨서자 두번 세번 주먹이 더 날아들었다.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나 싶었다. 경관들은 건성으로 그자를 붙들어 떼어 놓았다. 주경준은 다친 맹수가 날뛰듯이 잔뜩 일그러지고 격한 얼굴로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다. 입모양은 거칠고 소리는 없었지만 시문은 그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누가 쏘랬어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은 하고 지랄이냐
내가 어떻게 해 본다고 했잖아 내가, 병신같아도 친구 새낀데, 너 지금, 사람 죽였다고!
멱살을 우악스럽게 쥐는 손길에 시문은 또다시 맞을 각오를 했다. 그러나 그 그러쥔 주먹은 그저 멱살만 몇번씩 다잡으며 부르르 떨리기만 했다. 마침내 과다출혈로 자신도 쓰러질 때까지 주경준은 움켜쥔 그 손아귀를 놓지 않았다. 시문은 구급요원들이 그를 실어가는 것을 보고, 침묵 속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앰뷸런스의 녹색 경광등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왜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까, 하고. 대답 또한 들려오지 않았다.
시문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고요하다. 꿈에서부터 이어진 것마냥 적막이 온통 달빛과 더불어 방안에 감돌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잤는데도 머리는 묘하게 깨어 있었고 살얼음처럼 곤두선 신경은 최후의 보호막이 되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시문은 소리없이 조용히 발을 내딛어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렷하게 알고 있다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오래 시간을 들여 침실문을 열어보았고, 집안이 불빛 하나 없이 어둠에 가라앉아 있는 걸, 텐카가 몸을 웅크린 채 소파에 구겨지듯 잠든 걸 확인했다.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차분히 가라앉은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차가운 유황처럼 푸르스름한 빛을 내쏘고 있었다. 업무용 노트북을 놓아둔 책상으로 다가갔다.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구식 워크맨이 또렷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문은 손을 뻗어 워크맨을 손에 쥐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어둠을 긁어 깊은 생채기라도 내듯 지직거리는 불쾌한 노이즈가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선 채 손가락만 움직여 음량을 높이니 그 신경질적인 소음 속에 가느다란 바이올린 소리가 끼어들고 있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신음 같은 현의 울림. 한참이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시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익숙한 손님을 맞이하듯 무덤덤하게.
"나오시죠. 저 혼자 있습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동안 점차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코와 목구멍 안쪽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갑자기, 달빛 속에 어두운 불길이 치솟았다. 저승에서 온 불이었다. 단지 망자의 분노와 원한, 고통만 빨아먹으며 영겁을 불타기만 하는. 시문은 천천히 돌아보았다.
예상했던 모습이 등뒤에 서 있었다. 어깨가 벌어지고 머리를 짧게 치켜깎은 젊은 남자가 지그시 고개를 들어 시문과 시선을 마주쳤다. 시문은 소리없이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보아온 분노한 망령과 하나 다를 것 없는 모습이다. 핏기나 탄력 없는 창백한 회색 피부, 구부정하게 중심이 뒤틀린 자세, 표정없이 일그러진 얼굴. 조용히 반응을 기다리니 그자가 먼저 새까만 동굴 같은 입을 뻐끔거려 말을 걸어왔다.
- 기억해 낼 거라 생각했다
시문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주경준 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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