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영반 연재재개 기념, 겸사겸사 화이트데이 기념으로, 3년 전 글 잠시 올려두겠습니다.
i님 리퀘로 썼던 2012년도 발렌타인 이야기입니다. 제일 마지막편은 19금이라 아마도 삭제버전을 올리거나 비번제로;;
이 이야기는 후에 특영 장편 개인지 '디아스포라'에 수록했습니다.
-- 특영반 연재재개 기념, 겸사겸사 화이트데이 기념으로, 3년 전 글 잠시 올려두겠습니다.
i님 리퀘로 썼던 2012년도 발렌타인 이야기입니다. 제일 마지막편은 19금이라 아마도 삭제버전을 올리거나 비번제로;;
이 이야기는 후에 특영 장편 개인지 '디아스포라'에 수록했습니다.
Valentine special ; Tenka X Simun)
소리가 없는 꿈을 꿨다.
시문은 권총을 받쳐든 채 꼼짝 하지 않았다. 반동 탓에 한번 크게 튀었던 손목은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고 총신은 놀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화약 냄새가 질 나쁜 싸구려 폭죽처럼 코끝을 찔렀다.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며 그를 밀치며 달려가고 있었다. 깨져나간 유리조각이 수많은 발밑에서 다시 한번 으스러져 나갔다. 멀리서 붉게 번쩍이는 경찰차의 경광등, 급히 멈춰서는 앰뷸런스, 눈에 보이는 무수한 소음.
그런데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깨끗하게 먹어치운 것처럼, 도리어 평화로운 침묵. 아수라장의 도시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시문은 무거운 권총을 발사 자세 그대로 받쳐든 채 의아해하고 있었다. 이 꿈은 언제 끝나는 걸까. 아무런 해를 끼치지도 않고 아무런 감상도 불러 일으키지 않는데 왜 계속 반복되는 걸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채. 귀가 먹먹하니 침묵에 잠긴 채. 유리벽 속에 단 홀로 갇힌 것처럼.
갑자기 몸이 털썩 위아래로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시문은 간신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개운하지 않은 선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자신의 침대 발치에 조심성없이 앉은 걸 깨달았다. 흐린 시야를 가로질러 낯익은 얼굴이 거꾸로 그를 들여다보고 있다. 빳빳하게 세운 붉은 머리에 뭐가 그리 유쾌한지 아침부터 히죽거리는 날카로운 눈. 그가 놀리는 듯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며 웃었다.
"싀문씌 조흔 아침. 잘 자씀니카?"
그 웃음과 음성이 마치 신호탄이라도 된 것 같았다. 얼어붙어 있던 시문의 머릿속 정적이 깨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댐이 무너지듯 한꺼번에 머리맡 시계가 내는 초침소리, 윗집에서 어린애들이 뛰는 소리, 밖에 틀어둔 TV 소리, 그가 들어오며 열어제친 문이 천천히 벽에 텅 하고 부딪는 소리가 귀 안쪽으로 밀려들어 왔다.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불가항력으로 덮쳐오는 일상적인 소리들. 약한 현기증에 시문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별다른 반응을 안 보이자 텐카는 부추기기라도 하듯 침대 위로 무릎을 올리며 더 은근하게 몸을 밀어붙였다.
"응? 모닝 키스 안 해 줄커야?"
시문의 고개가 그에게로 향하자마자 동시에 텐카는 그 눈이 웃으면서 푸르게 강렬한 빛을 끌어올리는 것 또한 보았다. 이미 도망치기엔 늦었다. 매일행사처럼 벼락에 얻어맞고 텐카는 새까맣게 지져진 몰골로 몸서리를 쳤다.
"아파파파파팟! 폭녁 반대! 싀문씌 야만죡이야! 모닝 키스는 못 해줄 망령 피카츄임니카!"
"아, 입이 살아있는 걸 보니 아직 기운이 넘치네요. 한대 더 맞고 영원히 누울래요, 아니면 착하게 신문이나 집어올래요?"
마치 민원 창구에서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시민을 맞는 공무원처럼 상냥하게 웃는 포커페이스로 시문이 다시 한번 손을 들어올렸을 때, 독일에서 무취업 비자로 들어와 당국의 묵인 아래 관공서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처지인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텐카 히닝콸트 씨는 머리보다 빠른 본능으로 자신의 살 길을 택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뒷걸음질로 현관까지 나가면서 그 입은 본능을 배신한 채 끝까지 떠들고 있었지만.
"누, 누가 그카지 피카츄 무서버서 피함니카! 시 신문이 보고 십슴니다. 텐카씨, 쎄울 시장님이 국토부랑 어떠케 배틀 뜨는지 공곰해서 잠도 못 잤슴니...."
시문이 흘긋 노려보자 곧 조용해진 공기 위로 현관문 닫히는 소리만 가볍게 쿵 났다. 그리고 마치 비글이 한바탕 구르고 간 마냥 담요와 방석과 옷가지가 마구 어질러진 거실을 보며 시문은 다시 한번 속으로 살의를 으득 삼킬 뿐이었다. 자기 딴에는 아침 식사라고 준비했는지 식탁 위에 1.5리터 우유와 콘 프로스트(애들이나 먹는 달디 단 설탕 범벅의), 냉동실에서 막 꺼내 해동도 안 시킨 채 팅팅 얼어있는 식빵, 초콜렛 한줌이 구르는 꼴을 보니 이젠 살의조차 부질없이 한숨으로 변할 지경이다. 자신도 별로 살아가는 절차나 의례에 신경 안 쓰는 타입이라 여겼지만 이 물건은 좀 심하다. 자신을 심판하기 위해 저런 걸 눈앞에 내려줄 필요까진 없었는데, 라고 속으로 한탄하며 시문이 말라 비틀어진 빵쪼가리를 대충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울 때였다. 현관문이 다시 달그락 열렸다.
"시문씌?"
부르는 음성이 실없이 부르는 소리가 아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텐카는 끌고 나갔던 슬리퍼를 발 뒤꿈치로 아무렇게나 벗으며 시문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내민 손에는 누런 봉투가 들려 있었다. 우체국에서 어디서나 파는 흔한 안전봉투. 그 주둥이는 뜯겨 있었다. 길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텐카는 이유없이 남에게 온 우편물을 뜯어보는 그런 위인은 아니었다. 정상적으로 온 물건이 아니란 소리다. 시문은 다가오며 짧게 물었다.
"어디서? 알 수 있나요?"
"아무것도. 문밖에 이거 하나만."
"밤새 누가 왔다간 소리라도 들었나요?"
"아뉘. 전혀."
"위험물질...은 아니었나 보군요. 사지 멀쩡한 걸 보니."
"팔다리 하나츰 날라가쓰면 싀문씌 기뽀할 텐데 그럴 수야 업지. 무게도 냄새도 소리도 별거 업서서 열어바씀니다. 메모도 업슴니다."
뭐냐고 묻는 대신 시문은 손을 내밀었다. 텐카에게 온 물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은 이상 둘 모두가 대상이며 책임이 있었다. 매우 꺼림칙한 듯, 분명 내키지 않는 얼굴로 텐카가 내민 봉투를 받아들자마자 시문이 생각난 듯 고개를 쳐들었다.
"신문은?"
다시 문이 쾅 닫혔다. 그리고 시문은 혼자 봉투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아주 잠깐 망설인 후, 손가락이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깊숙이 든 납작한 사각 물체를 건드릴 때까지.
마음이 급했다. 말도 없이 몰래 신문을 집어가려는 옆의 옆집 여자를 잡아 실랑이를 하다 말고서야, 중요한 건 지금 신문이 아니라는 점을 퍼뜩 깨달았다. 텐카는 여자의 기세등등 우악스러운 목소리를 뒤로 하고 서둘러 복도를 되돌아왔다. 현관 안에 들어서며 슬리퍼를 되는 대로 벗어 던지며 불렀다.
"싀문씌!"
시문은 커튼 사이로 희부연 햇빛이 흘러드는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잔뜩 햇살을 뒤집어쓴 채 바닥에 나뒹구는 노란 안전봉투는 마치 바위로 만든 듯 보였다. 고개 숙인 채 자기 생각 속에 갇힌 듯 두 손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의 망연한 뒷모습. 혹시 뭔가 알아낸 건가. 시문에게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나. 숨쉬기 버거울 만큼 폐가 옥죄어드는 기분으로 텐카는 손을 뻗어 시문의 어깨를 잡아챘다. 혼자 두는 게 아니었다. 머릿속이 흑백으로 하얗게 물드는 느낌. 자신의 순간적인 멍청한 실수를 질책하는 텐카가 잡아끄는 대로 시문의 고개가 뒤로 돌아왔다.
"네? 왜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올려다보는 표정에 텐카는 순식간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흐늘흐늘해져서 데친 자이언트 오징어마냥 바닥에 무릎 꿇는 텐카를 향해 시문이 또 잔소리를 퍼부을 태세를 취했다.
"또 신문 안 집어오고 대체 뭐 한 겁니까? 텐카씨 벌써 치매가...."
"치망 아님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싀문씌 대체...!"
억울한 듯 벌떡 일어나는 텐카를 말끄러미 보다가 시문이 겨우 손을 치켜들었다. "아아, 이거요?"
지저분한 카세트 테이프 하나가 그 손에 들려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더빙용 공테이프.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녹음하고 지우고 덧씌우기를 반복했는지, 라벨은 몇 겹으로 붙었다가 찢겨나가 너덜너덜하고 몸체는 온통 손때가 묻어 어디 쓰레기통이나 남의 집 벽장에 묵혀둔 걸 금방 주워온 듯한 모양새였다. 텐카는 그걸 받아들어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 보고, 겉으로 드러난 마그네틱 테이프를 햇빛에 가늠해보며 입을 열었다.
"...역시. 시문씌도 모르는 거임?"
"텐카씨도요? 하긴, 본인이 본 적 없는 물건이니 제게 확인차 넘겼겠죠."
혹시나해서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봐도 딱히 신통한 구석이 떠오르지 않는다. 시문은 바닥에 구르는 안전봉투를 몇번 째인지 모르게 다시 살피며 텅 빈 안도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저야 시골에서 자랐으니 카세트나 LP판이야 많이 봤다만서도 제 걸 가져본 적은 없었죠. 경찰청에서 자료용으로 남기는 건... 제가 들어왔을 땐 이미 디지털로 거의 전환된 상태였고. 저도 심문이나 방청 녹취는 MP3만 써 봤네요. 텐카씨야말로 짚이는 곳이 없나요?"
"아니 머... 나한테 태클 걸 정도면 가뵵게 C4나 클레이모어로 꽝~ 아파트 통채 날렸으면 날려찌. 이로케 기엽게 카... 카셋트 테이프로 고백하는 귀요미는 업슴니다 모. 회칼이라면 모를카."
"그건 그렇네요. 하긴, 저라도 그냥 길가에서 콱 쑤시고 가지 굳이 텐카씨에게 이런 에너지 낭비를 왜 하겠어요."
둘이 마주보고 하하하하 웃다 말고, 텐카가 맛이 가서 칼을 찾고 시문이 손에 전뢰를 모으며 눈싸움 한 지 몇 분. 텐카가 혀를 쯧 차며 내뱉었다.
"머 나야 쿨릴 거 업슴니다? 이론 치질한 원한이라면 싀문씌 타입임니다만?"
"아, 그러세요?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울 것 없는 해맑은 영혼이십니까?"
"아니 머.... 지은 재야 만치만 머! 머! 재를 미오하랬지 사람을 미오하랬슴니카? 싀문씌 초잔하다?"
"아뇨, 죄 말고 사람도 좀 미워하고 싶지 말입니다. 텐카씨 당신 얘기 맞습니다만."
결국 언제나 그렇듯 짐승 둘이서 으르렁 거린 끝에 무언의 휴전 제의가 오간 다음에야 각자 손을 내려놓고 조금 긴장된 분위기가 돌아왔다. 보낸 자의 정체도 의도도 짐작할 수 없는 백지 상태의 봉투. 그 안에는 사람 손을 오래 탄 듯한 더러운 카세트 테이프만 하나. 기분 탓인지 조금, 등골이 찌르르한 불쾌감이 올라왔다. 낯선 것이 낯선 맥락에 던져졌을 때 느끼는 본능적인 경계심이다. 텐카는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쓸어넘기며 당치도 않게 정석적인 해법을 내던졌다.
"그러케 신경 쓰이면, 틀어보지 그래? 알망이를 들으묜 먼지 알 거 아냐. 물런 순굘한 영혼인 텐카씌하고는 관게 업겠지만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빠른 문제 해결 앞에 가차없이 닥친 현실 앞에서, 시문이 조금 난처한 듯 혹은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카세트 플레이어만 어디서 하나 좀 주워오시죠."
자다 깨서 뜬금없이 경찰청에 호출되어 불려나온 청소년은 매우 사회에 불만이 많은 얼굴이었다. 사실 누구라도 안 그랬으랴. 성황당집 강바람군은 눌러쓴 비니 아래 더없이 험악한 눈매로 비닐봉다리로 둘둘 싼 물건을 팍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됐어요? 이런 골동품 때문에 새벽부터 사람 오라가라 하고 있어, 우씨."
"어머나, 강바람군. 학교 안 가서 팔자가 좋구나! 아침 열시가 새벽이라니 밤새 인던 돌고 있었쪄요, 우쭈쭈쭈? 뒷치기랑 먹튀도 당해쪄요?"
스*벅스 톨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들고 상큼하게 들어선 소피아의 인사 아닌 인사에 본부 안에 쌀랑한 기류가 감돌았다. 뿔난 중학생 어린이가 간이 배 밖에 라지 사이즈로 외출나온 강명자씨에게 일대일 PK를 신청했습니다. 두 사람이 신나게 전투를 벌이는 동안 시문과 텐카는 질겁을 하며 바람이가 들고 온 물건을 간신히 사수했다. 'FBI 채찍'에 맞서 분노의 부적질을 날리다 말고 바람이 목청을 높였다.
"아저씨들 그거 망가지면 알아서 해요! 저도 집구석에서 어렵게 찾아 온 거라고요! 아버지 콜렉션이라 그냥 안 넘어갈 줄 아세요."
"녜이~ 녜이~ "
들은 척 만 척 귓등으로 흘리며 텐카는 검은 비닐을 뒤집어 아무렇게나 톡톡 털었다. 족히 십오년은 묵어보이는 둔한 디자인의 워크맨이 굴러나왔다. '우와, 제법 소니 검니다!' 하고 흥이 오른 텐카가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보는 동안 시문은 양복 안주머니에 든 내용물을 끄집어내려다 말고 멈칫했다. "미안하지만." 그는 투닥거리는 소피아와 바람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잠시 자리 비켜 주겠습니까."
동시에 바람과 소피아의 움직임이 멎었다. 둘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고, 그들로부터 시선을 돌린 채 답지않게 진지한 텐카의 옆모습을 한번 본 후, 한 발짝 씩 뒤로 물러섰다. 냉정을 되찾은 소피아가 지나치게 추궁하는 어투가 되지 않도록 조절한 음성을 냈다.
"사적인 문제인가요?"
"...모르겠습니다. 아니, 공식적으로 하달 된 문제가 아니니 사적인 문제라고 보는 게 맞겠죠. 텐카씨?"
보충설명을 요구하듯 시문의 눈이 그를 향했으나 텐카는 가볍게 웃으며 그 눈길을 떨쳐내었다. 그러면서도 충실하게 말은 받아 이었다.
"그런 셈인가. 여튼 먼지 모르게찌만 싀문씌나 이몸한테 볼일이 있는 거 가트니카. 갠히 단 사람 말려들 피료 업찌."
"딴 사람 아니라고요! 나도, 아니, 우리도 특영반 요원인데 무슨 소릴!"
강바람이 발끈했으나 소피아가 소년의 입을 틀어막고 무자비한 힘으로 질질 끌어내 문가까지 갔다. 문을 닫고 나서기 전에, 버둥거리는 바람의 머리를 한대 장난 삼아 쥐어박은 후 소피아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좋아요. 그냥 넘어갈게요.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른 척 말고 바로 부르기예요?"
"웁 우웁 웁웁...!"
"어머나, 청소년도 동의한다고 하네요. 너무 위험한 짓은 말라고. 호호호, 보기보단 어른이라니까요."
'아줌마 시끄러'라고 내뱉으며 텐카는 문을 지그시 눌러 그들을 쫓아내고 문고리까지 잠가버렸다. "자." 돌아서며 텐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농담처럼 웃는 그 붉은 눈에 팽팽한 경계심이 감돌고 있는 걸 놓칠 시문이 아니었다.
"그롬 시작해 보쟈그, 밤장님."
시문이 덱을 열고 카세트를 꽂아넣는 동안, 텐카는 전선을 아무렇게나 둘둘 만 이어폰을 꺼내 잭에 끼우려다 말고 멈췄다. 원래는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서 들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고 보니 정체 모를 소리를 귓속에 가둔다는 게 찜찜할 뿐더러 그리 좋은 생각 같진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시문에게 간단히 물었다.
"스피커로?"
시문이 눈짓으로 동의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구식 워크맨을 사이에 둔 채 마주 보고 앉았다. 들이쉬는 숨소리까지 들릴 것처럼 공기가 팽팽해졌다. 손가락 끝이 축축해질 정도로. 별것 아니라 웃어넘기면서도 텐카 또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오렌지색 불꽃을 일으킬 듯 보였다. 동요를 감추려는 양 텐카는 에잇 하고 손을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가 곧바로 재생 버튼을 콱 눌렀다.
....... 그리고 이어서 의자로 펄쩍 뛰어오르며 방석을 쳐들어 얼른 얼굴을 숨겼다.
"몰라몰라, 플레이 해 버료따! 난 아무 잘못 업슴니다! 밤장님이 권룍으로 순진한 텐카씌를 희농해쏘!"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예요! 시끄러워요, 안 들리니까 좀 가만 있어봐요!"
"쟈긔가 더 큰소리묜서! 캬악, 자바가려면 욘약한 텐카씌 말고 싀문씌를 자바가세효!"
"먼저 제 손에 죽어볼래요?"
재떨이를 집어던질 것처럼 들어올리다 말고 시문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지직, 직....
긁히는 듯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테이프는 착실하게 두개의 눈구멍을 굴리며 돌아가고 있었고, 분명 침묵과는 다른 공허한 음색이, 공백이 신음하는 것 같은 노이즈가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텐카의 입이 벌어졌다. 그가 실제로 소리 내 말할 생각이 없는 걸 잘 알면서도 시문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입가에 세웠다. 조용히. 그리고 집중.
까마득하게 추락하는 기분이다. 스크라치가 들어간 올드한 영화 화면을 보는 것처럼. 지직거리는 아무것도 아닌 회색 소리. 신경을 긁는. 그 테이프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다. 아니, 침묵이 담겨있다. 귀가 먹먹해지는 공허다. 혼돈이다. 마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듯, 맨몸으로 새하얀 눈밭에 내몰린 듯, 시문은 천천히 기어오르는 한기를 느꼈다. 춥다... 춥다... 멀다... 없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뭉개져 학살당한 소리. 아득하니.
침묵.
"이게 뭐야!"
쾅 하고 텐카가 탁상을 걷어차는 굉음에 시문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한기에 얼어붙은 듯 손가락이 곱아 잔뜩 손바닥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텐카는 등을 꼿꼿이 세운 자세로 주머니에 손을 끼운 채 구둣발을 휘둘러 탁상 위 워크맨을 넘어뜨렸다. 발작하듯 지직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텐카가 여전한 무표정으로 멈춤 버튼을 누르지도 않은 채 강제로 테이프 덱을 끄집어내려다 손가락만 치이고는, 워크맨 째 벽에 집어던지려는 동작을 취했다. 시문이 그 팔을 잡아당기고서야 겨우 멈췄다. 그가 돌아보며 내뱉었다.
"악질 농담임니다! 완죤 놀림당해쏘. 갠히 촐았쟈나! 열받슴니다!"
"기다려 봐요, 텐카씨. 잠깐만!"
텐카는 워크맨을 움켜쥔 채로, 시문은 그런 그의 팔을 거두잡은 채로, 그림처럼 그렇게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십초 이십초 부질없이 시간이 흐른 끝에. 시문이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 얼음같은 푸른 눈과 굳은 턱으로 간신히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뭐죠? 들리나요, 텐카씨? 소리가...."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텐카는 그 손짓이 시키는 대로 고개를 기울여 청각을 모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손가락이 워크맨을 거듭 거머쥐었다. 희미한 소리. 노이즈 속에 섞여있다. 그도 놓치지 않았다.
창백한 묵음 속에 지직거리며 또다른 소리가, 어둠 속에 달이 떠오르듯 희미하게 섞인 게 들렸다. 아주 작고 불투명한 불청객 같은 소음. 자칫 노이즈에 지워질 만큼 가냘프게 밑바닥에 들릴 듯 말 듯 깔려 있다. 온 신경을 기울이느라 등근육이 딱딱하게 일어났다. 그 꺼질 듯한 소리의 정체는.
"바이올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짧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자각의 순간 소름이 쌔하게 돋았다. 지직거리는 굵고 기형적인 노이즈 속에서 볼륨을 최대한 줄인 라디오처럼 선율이 가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흐느끼는 듯 신경질적인 짤막짤막한 바이올린 소리. 묘하게 섬뜩한 우울한 가락. 자신도 모르게 시문은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이건 뭐지? 대체 누가? 등골을 서늘한 손가락이 하나하나 훑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쩡 하고 울렸다.
"텐카씨...!"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상대를 쳐다볼 무렵이었다. 갑자기 바이올린 소리가 튕기듯 끊기더니 또다른 소리가 끼여들었다. 나즉이 웃음소리가 퍼진다. 시문의 동공이 파르스름하게 커졌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누군가 저 건너편에 있다. 비웃는 듯 토막 난 웃음소리. 아니면 흐느낌? 바닥을 기며 긁히는 듯한 그 기분 나쁜 소리로.... 먼저 움직인 것은 텐카였다.
눈치채기도 힘들 만큼 빠른 몸놀림으로 워크맨에서 테이프를 잡아빼고, 벽에 있는 힘껏 내동댕이 쳤다. 둘 모두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게 전부라는 걸. 테이프 뒤는 공백이다. 핵심은 바로 이 바이올린 소리와 무기질적인 낮은 웃음 뿐이라는 걸. 그 짧은 동작으로도 힘에 벅찬 듯 텐카는 온 어깨로 숨을 고르며 멍하니 반공백 상태인 눈을 들어 시문을 향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을 내어 말했다.
"난 모르는 일임니다?"
시문은 자신의 손톱이 파고들어 손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긴 걸 깨달았다. 쥐가 난 듯 감각이 없는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하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생생한 그 소름끼치는 느낌. 그는 텐카에게 들려주기보다는 스스로를 추스르기라도 하듯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저도요."
시문의 머릿속이 추락하듯 희부옇게 멀어져 갔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모르고 싶습니다, 텐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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