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터 발렌타인 2편
똑바로 누워 눈을 감았다. 팔을 몸 가까이 붙이고 양손바닥을 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잠이 눈꺼풀을 눌러오자마자 시문은 그 꿈이 마치 충실한 검둥개처럼 발치에 웅크린 것을 보았다. 꿈은 박쥐처럼 눅눅하고 검은 날개를 펼쳐 시문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뒤덮었다. 또다시 소리없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묵직한 총의 무게가 손에 걸리고, 막 쏘고 난 반동에 손목뼈가 울려서 아리고, 얼얼한 화약 냄새, 손가락 피부가 벗겨질 듯 뜨겁게 느껴지는 총신.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불빛들. 터질 듯 웅웅거리는 확성기와 사이렌은 목청껏 침묵의 소리를 고래고래 내지를 뿐이었다. 시문은 그곳에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리는 동료 형사들과 제복경관들이 고함 치는 동안 건물 구석에 몰려 흐느껴 울던 인질들이 패닉에 빠져 도망쳐 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시문은 발사각 아래로 천천히 권총을 늘어뜨렸다. 누군가가 곁에서 뭐라뭐라 말하며 그에게 권총 압류를 요구했다. 아직도 시문이 일그러진 손마디 안에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총을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얼굴이 흙빛이 된 고강도가 옆에서 계속 뭐라고 하고 있다. 입모양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보지 마, 시문아. 볼 필요 없다.
왜 그래야 하나? 강도의 만류야말로 별 필요없는 참견이라 느끼며 몸은 본능이랄 만큼 자연스럽게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재빠르게도 현장이 통제되고 노란 테이프가 둘러지는 중이었다. 늘 보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안타깝고 불미스러운 범죄 현장일 뿐이다.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자신이 그 자리를 만드는데 한몫 했다는 정도. 시문의 발걸음이 멈췄다. 구물거리며 바닥을 기어오는 검붉은 자국.
번질거리며 탁한 윤기를 머금은 피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강력반 형사로서 수십 수백번이나 보아온 장면 그대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숨쉬던 인간의 몸에서 유실되어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시꺼멓게 먹혀들며 굳어가는 중이었다.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는 이 장면에서 유일하게 이해하기 쉬운 강렬한 언어였다. 누군가가 우악스럽게 시문의 어깨를 잡아챘다. 조급함 속에 희미한 두려움과 짜증으로 가득 찬 손이다. 이후에 이어질 여러 사람 번거롭고 피곤하게 만들 절차를 예측한 탓에 잔뜩 성이 나고 날카로워진 여러 감정이 뒤섞인 냄새가 났다. 입모양이 말한다. 가까이 가지 말라고, 어? 또 무슨 꼴을 보자고 혼자 나대는데.
시문이 멍하니 그 입모양을 바라보는 와중 또다시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구석에서 피투성이로 뒹굴던 또다른 그림자가 휘청거리며 상체를 세우고 있었다. 몸을 가누기도 힘든 부상인데 피에 전 옆구리를 움켜쥐며 기어이 일어나 섰다. 그리고 그자는 시문이 어깨를 잡혀있는 동안 구멍 뚫린 몸뚱이로 비틀비틀 달려오기 시작했다. 목젖이 다 들여다보일 만큼 벌어진 입. 고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피투성이 남자가 굳은살 배긴 주먹을 쳐들었다. 시문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막지 않았다. 그냥 귓속에 들어찬 이 톱밥 같은 침묵이 거슬릴 뿐.
-- 이시문!
분명 그렇게 외쳤을 텐데. 여전히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마치-- 죽은 자들의 세계처럼.
꿈에서 깨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그는 깊은 물 속에서 수면으로 떠오르듯 공기와 소리로 가득 찬 현실을 호흡하기 위해 애썼다. 죽은 자들의 세계? 그런 의미였나? 불빛이 필요했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시문은 손가락으로 겉이불을 움켜쥔 채 스탠드를 켜기 위해 다른 한 손을 허공에 내뻗었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뭔가를 어둠 속에 툭 건드렸는데.
시문은 눈을 크게 떴다. 팔꿈치로 친 건 분명히, 사람 머리였다. 딱 하고 부딪친 느낌과 단단한 정도와 그 높이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노려보자 어둠 속에 흐릿하게나마 형체가 보이고 있었다. 자신의 침대 아래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세워 앉은 텐카의 뒷통수와 비죽 솟은 어수선한 머리가. 시문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체념했는지, 텐카는 여전히 무릎을 끌어안은 채 매우 뒤늦게 중얼거렸다.
"......아야."
시문은 하던 대로 손을 뻗어 스탠드를 켰고, 눈을 찌르는 불빛이 침대 주변을 밝히자마자 가늘게 찌푸린 눈으로 그자를 말없이 쏘아보았다. 텐카는 벌떡 일어나 적반하장으로 화내는 척 할까, 몽유병자인 척 할까, 능청을 떨까 본인도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듯했으나 결국 뭘 해도 시문에게 안 통할 걸 일찌감치 깨닫고는 그냥 순순히 착한 양처럼 목을 들이밀기로 최종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는 입을 비죽 내밀며 툴툴거렸다.
"왜! 나는 걱정하묜 안 댐니카. 암만 바도 선냥한 나보다는 싀문씌가 칠리는 거 많을 거 아님니카. 폭녁굥찰이니 얼마나 원한을 마니 샀게쏘."
"그래서, 살금살금 한밤에 남의 방에 들어와서 무슨 짓인데요. 소파 좁다고 시위합니까?"
"머 그것도 욜받지만! 그래도 싀문씌, 요즘 쿰자리도 사모하는... 아니, 사나운 거 가타서 그럿슴니다?"
시문은 더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조금 피곤한 꿈일 뿐이라고 여겼는데 늘 밥상머리 앞에서부터 온종일 마주보는 사람 눈에는 또 아니었나 보다. 불현듯 어떤 장면이 눈꺼풀 위로 눌러새기듯 스쳐갔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방, 미동도 없이 잠든 자신과 그의 꿈을 파수하듯 등을 대고 앉은 어둑한 그의 옆 그림자가. 가끔씩 수그렸던 고개를 쳐들어 잠든 이의 숨소리를 확인하고는 가라앉듯 본래 자세로 돌아가는. "텐카씨...."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부르려다 말고 시문은 말문을 닫았다. 이 상황에 어울리는지 아닌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단편적인 기억이 떠올랐던 탓이다. 시문은 다시 목소리를 고쳐 정색하여 말했다.
"그러고보니 텐카씨, 전에 지나가는 말처럼 들었던 것 같은데요. 당신 능력이 꿈과 관련된 거라고. 꿈이나 이미지에 접촉하는 식으로...."
"머? 쿰? 몰라여, 그게 먼데. 괜히 함밤에 캐서 배만 고파졌는데 싀문씌가 이상한 소리 해. 잠코대 함니다?"
텐카는 자연스럽게 시문의 말을 가로막았다. 긴 다리를 쭉 펴 일어나려다 말고, 오래 쭈그리고 있어서 쥐가 난 듯 발꿈치를 잡아들고 아야야야 하며 주무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시문을 돌아보는 그의 히죽 웃는 붉은 눈은 늘 그랬듯 어둠의 장막 뒤로 숨어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채색 돌처럼 빛나고 있었다. 한순간 손아귀에 잡았나 싶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뒤로 물러나 버렸다.
"어뜨케 책임져 줄 커야, 싀문씌. 몸으로 갑던가 야식집 배달 시켜쥬지 아느면 유효기간...유횰사태가 벌어질 검니다?"
그가 그렇게 벽을 친 이상 자신으로서는 그 안쪽을 비틀어 열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시문은 그간 충분히 배웠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의 곁에서 밤새 손을 뻗어 꿈을 읽어내려 했다고 해도 자신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알았다 하더라도 무엇이 변하겠는가. 어차피 자신의 몫은 자신의 몫. 정말 그가 시문의 꿈을 엿봤다 해도 그것이 오로지 시문 혼자 감당해야 할 과거 기억인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기껏 해 봤자 그 당시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책임한 위선 또는 잘잘못을 어설프게 따지는 윤리적 지적 뿐이겠지. 그러나 동정과 혐오를 위선과 지적으로 감싸 포장하는 일은 시문과 마찬가지로 텐카에게도 몹시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그나 자신이나 그런 참견에 능숙한 위인이 못 된다는 사실만이 시문에게 어렴풋한 위안이 되었다.
"응?"
시문의 무반응에 오히려 재촉하듯 텐카는 손을 들어올려 그의 턱선과 그로부터 이어진 옆얼굴을 감쌌다. 크고 굵직하고 긴 손가락이 전하는 온기가 싫지는 않았다. 그에 이어 허락을 구하듯 자신의 앞머리에 기대어오는 이마조차도. 체온과 감촉이 맞닿고, 고른 숨결이 콧날에 와 닿았다. 둘이 함께 정했던 경계를 그렇게 스스럼없이 침범하는 그의 모습은 시문에게 있어 낯설면서도 동시에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받아주지 않는 농담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고 들여다보는 붉은 눈만 어둠 속에 남은 유일한 색채인 듯 싶었다. 갑자기 시문은 더없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왜 하필 이런 밤에 그러는가. 이 사나운 밤에 옆자리에 남아있는 게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당신인가. 시문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시선을 돌려 의미없이 번들거리는 스탠드 불빛을 돌아보았다.
"전화...."
"응?"
"내 핸드폰 어디 있나요."
고강도가 오늘밤 당직이라 다행이다. 시문이 단축번호로 저장된 그의 번호에 전화를 거는 동안, 텐카는 소리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자리를 피해주겠다는 듯 쿡쿡 낮은 웃음소리만 남긴 채 거실 혹은 베란다로 나가버렸다.
"어, 시문아. 왜."
수화기 저편으로 졸음에 겨운 고강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시문은 다짜고짜 용건부터 내뱉었다.
"선배, 물어볼 게 있어요. 주경준 선배 소재지 파악됐나요?"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이름을 입에 담았으나, 듣는 입장으로서는 그렇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3년 반이나 지난 일이다. 당혹감은 한참 이어지는 수화기 너머 침묵으로 증명한 셈이다. 한참만에 잠이 확 깬 목소리로 응하는 고강도의 목소리에는 경계심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시문이 너 설마.... 아직도."
빠르게 지나치는 고속도로 변 풍경은 끝없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청묵색 산등성이와 회갈색으로 군데군데 눈을 덮어쓴 논밭만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안개가 고였다가 느리게 흩어지고 다시 고요해졌다. 새벽같이 출발한 탓에 아침은 아직도 앞서 서성거리며 짙부연 청회색 어둠만이 끈질기게 도로에서 춤추고 있었다. 시문은 블랙도 프림도 아닌 신문지 같은 맛만 나는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 도로 내려놨다. 차라리 담배가 낫겠다. 운전대를 잡은 채 손가락 새로 담배를 빼물어 한모금 뱉고나자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곁눈으로 번호만 확인한 후 핸즈프리로 통화를 연결했다.
"정말 가는 거냐?"
강도 선배였다. 시문은 문득 입맛이 써서 다시 한번 종이컵 커피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왜 진작 이걸 도로변에 쏟아붓지 않았는지 후회했다. 담뱃재나 떨면 유용할 듯 싶었다.
"네."
짧은 대꾸에 강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좀전보다는 잠이 깨고 생각도 정리했는지 또렷한 음성이었다.
"시문아, 혹시 해서 묻는 건데. 너 아직도 그 사건 신경쓰는 거니...? 아니, 미안. 표현을 잘못 했다. 당연히 신경 쓰이겠지. 네 일이니까 남이 대신 고민해 줄 수도 없는 거고."
"아뇨, 딱히 별로 신경 안 써요."
고심해서 말을 고르는 강도가 무색하도록 딱 자르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강도는 확신이 없는 듯 아직 어물거렸다.
"어, 그래도...."
"하긴 그렇죠. 남 보기엔 그림이 좀 살벌하긴 해요. 보석상 탈취범이 인질 잡고 형사도 칼로 쑤시자 멋모르는 신입이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런 스토리니까요. 사람 죽인 것도 좀 그런데 강도가-아, 선배는 대체 이름이 왜 그래갖고- 찔린 형사하고 고향 친구라 일이 더 꼬였고요. 상부에서 일 덮느라 입단속까지 겸해서 더 부서 전체를 쥐잡듯 몰았죠. 저도 참 용하네요. 그 와중에 삼년 반이나 눈치도 없이 잘 버텼어."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인데 불공평하게도 고강도를 힐난하는 듯한 투가 됐다. 그게 마음에 걸려서 시문은 좀 누그러뜨린 어조로 다시 말을 조심스럽게 이었다.
"선배... 전 정말 괜찮아요. 그때도 말했지만. 그런 걸로 신경 쓸 녀석 아니예요."
"...하긴. 넌 청문회 가서도 같은 상황이 와도 똑같이 행동하겠다고 뻣뻣하게 선언한 놈이지."
피식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가슴이 까맣게 탄 소리다. 그전에도 그후로도 이 사람좋은 인물은 계속 그랬다. 나름 고향 선배라고 혹시나 잘못될까 안절부절 못 하고 잘 되면 자기 일처럼 뿌듯해 하고. 시문도 뒤따르듯 같이 픽 소리내 웃었다.
주형사와 임채환 또한 그랬겠지-
시문은 다시 깊숙이 담배 연기를 속에 담아넣었다 반쯤 열린 창문 밖으로 뿜어냈다. 철근을 과적재한 3.5톤 대형트럭이 바로 귀옆을 스치며 덜걱거리며 콘크리트를 뭉개 달리는 굉음이 폐부까지 울렸다. 이상하게,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형사가 된 이유도 이런 사소하고도 열띤 살아있는 오감이 필요해서였는지 모르겠다. 시문은 자신이 형사건 아니건 피우던 꽁초를 그대로 창밖에 내버리며 화제를 처음으로 되돌렸다.
"그래요. 가는 길이예요. 전북 군산 맞죠? 주경준 선배하고 임채환 고향이."
"독한 놈. 하여간 한번 고집 피우면 돌아간 할매도 못 꺾는다니까. 운전이나 조심해라, 임마."
"가는 길 적적한데 말동무라도 좀 해 줘요."
"싫다, 짜식아. 미쳤냐. 밤새 당직 서고 이제 토끼같은 마누라랑 강새기 같은 새끼 기다리는 스윗 홈으로 가야지."
"선배 변했다."
잠깐 의중을 찔린 듯한 침묵이 이어지자 시문은 또 쿡쿡 웃었다.
"농담이예요. 그렇다고 또 굳긴."
"아, 이놈. 사람 간 떨어지게 하긴. 갈수록 늬 도깨비 같은 룸메만 닮고 말야."
"그러게요. 어쩌다보니 계속 가까이 지내고, 그러면서 닮는 모양이네요."
뒤에서 하이빔을 번쩍거리며 숨이 턱에 닿은 속도로 달려드는 승합차에 능숙하게 차선을 내주며 시문은 다시 무심결에 맛대가리 없는 커피를 한모금 더 들이켰다. 눈가가 먹먹한 푸른빛을 머금었다.
"맞다. 그 이상한 외국인 좀 잘 지켜보고 있어요. 그 인간이 혹시라도 우리 과 중학생에게 뭐 좀 영시해 달라고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 절대 남들이 그 물건 못 만지게 해 줘요."
"뭔데. 폭탄이라도 돼?"
"...그냥 오래 된 물건이예요. 누구나 옛날에 써봤을 그냥 공테이프. 좀 더럽고 낡은."
자신도 모르게 약간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시문은 정면을 향했다. 멀리서부터 내려온 강물이 눈 쌓인 둔덕 사이로 반짝반짝 빛났고 말라죽은 밀짚 같은 잡초들이 바람결에 일제히 누웠다 서며 나부끼고 있었다. 해는 아직도 더디게 더디게 산 뒤에서 기어오르는 중이다. 시문은 또 근거없는 허전함에 담배를 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다시 두서없이 입을 열었다.
"선배, 그거 알아요?"
"뭐가."
"저도 흘려들은 얘기라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는 그냥 속에 담아둔다. 그러면 시간이 옳고 그름을 폭로해준다. 그렇게 믿고 그에 충실하게 살았으나 언제나 예외는 있기 마련인가 보다. 그새 또 졸음에 겨운 듯한 강도의 음성을 들으며 시문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지나가는 꿈결의 이야기인 양 흘려 말했다.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꿈은 죽은 자가 보내는 메세지일 수도 있답니다."
"엉, 그래? 우우... 모르겠다. 늘 뻗어서 잤다가 자명종에 후다닥 깨는 인생이다 보니 꿈도 꿔 본 적이 없어."
"형사란 게 다 그렇죠, 뭐. 됐어요. 그냥 그렇다는 소리니 잊어버리세요."
"잊고 자시고...."
강도가 투덜대며 뭐라고 하는 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마음이 편했다. 자신을 알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몇 안 되는 사람. 그만큼 신세졌으면 됐다. 시문은 들릴 듯 말 듯 웃으며 마무리할 셈으로 말했다.
"이제 톨게이트 지나요. 밤새 저한테 시달리느라 고생했으니 들어가서 쉬세요. 전 볼일 보고 올라갈게요."
"잠깐, 시문아."
연결을 끊으려던 그의 손길이 멈칫했다. 정작 해야 할 말은 아무것도 못 했다는 듯 고강도가 빠른 속도로 맥락없이 마치 붙들기라도 하려는 듯 말을 잇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그곳 출신이라 해서 거기 가면 주선배 행방을 알 수 있단 보장은 없어. 며칠 더 기다리면 제대로 현거처를 수배할 수 있을 테니까...!"
"아뇨. 꼭 주형사 일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알아보려고요."
시문은 부드럽지만 꼭 그만큼 표정없는 얼굴로 눈을 내리깔며 통화종료 버튼 위로 손을 움직였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또 연락할게요."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으나 그보다는 종료음이 더 컸다. 시문은 벼르던 한 개피를 더 빼물며 좀더 속도를 높였다. 마침내 차갑고 울적한 2월의 백색 태양이 온 지평선을 태우며 떠오르고 있었다. 어둠이 창백한 고개를 돌려 뒤로 물러났고 하늘은 장난감 유리알처럼 혼탁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강도에게 큰소리 치긴 했지만 사실 별다른 소득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저 요즘 계속 꾸던 뒷맛 안 좋은 소리 없는 꿈에, 정체 모를 소음이 담긴 카셋트 테이프가 머릿속에서 만나 불현듯 화학작용을 일으킨 결과였을 뿐이다. 그 꿈을 꾸지 않았다면, 그 테이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시문이 이런 종류의 고약한 장난질에는 촉이 빠른 특수과 반장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그 사건들을 연결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별다른 근거도 없이 불확실한 감 하나만 믿고 혼자 내려왔을 때는 빈 손으로 돌아갈 각오도 선 상태였다. '귀신 잡는 부서' 반장 노릇하며 이런 류의 시행착오를 한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시문의 생각보다 녹록하지 않았다.
"뭐요? 임채환?"
어렵사리 연락이 닿아 연결된 지인이란 자들은 전화 통화에서부터 질색을 하며 말문을 막기 일쑤였다.
"아니, 그놈 때문에 우리도 얼마나 문초를 당했는지 아시오? 아주 치가 떨리네. 몇번이나 말했잖소. 나는 그놈 잘 알지도 못 하고, 밥 한번 얻어먹거나 형 소리 한번 들어본 적 없다고. 보소, 서울서 온 형사 양반이면 다요? 아주 그 등쌀에 그놈 온 가족친지 고향서 못 살고 뜬 지가 이태요. 그런 걸 생판 남인 내가 뭘 알겠소?"
으레 그런 식이었다. 내 바쁘다고 서둘러 끊으려는 걸 간신히 말려서 겨우 하나 더 묻는 게 고작이었다.
"그럼 주경준은?"
다급하게 내뱉는 그 이름에 상대편은 잠시 거북스러운 침묵을 지키고는 했다. 그러나 격앙된 음색을 약간 추슬러 나름 설명한다고 하는 내용물은 거진 거기서 거기였다.
"아, 그.... 서울에 거 뭐냐, 경찰청 형사과인가 있던 경준이 말이지? 걔야 좀 발랐지. 바른 놈이였어. 쯧쯔... 임채환이가 강도질하며 인질 잡고 난리통 치는 현장서 하필 마주쳤다가 배때기 징허게 찔렸다지?"
"네, 그 후에 대해 들은 게 있으십니까?"
"거, 난 몰라. 말했다시피 임채환이고 주경준이고 일가가 죄 타지로 떠 버렸다 아뇨. 임채환이가 사살된 거야 싸다 쳐도 주경준이 뭔 죄고. 내 듣기로는 크게 다쳐서 반폐인 상태로 형사 때려치고 내려와서 입원했다카던데. 그마저도 사정이 안 좋아서 어딘가 요양차 갔다가 소식불명 됐다 카드만...."
어디를 찔러봐도 비슷한 얘기 뿐이다. 시문은 황급히 끊긴 전화기 너머 삭막한 종료음만 멀거니 듣고 있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듯 바닥이 일렁이는 걸 느끼고서야 자신이 꽤 오래 공복 상태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허기보다는 욕지기가 위장 깊은 곳에서부터 쥐어짜듯 치밀었다.
'새로 태어난 셈 쳐라.'
반복되는 경위서, 조서 작성, 이름만 달리 한 위원회 혹은 공청회, 심리에서 되풀이되는 앵무새 같은 진술, 현장 검증, 처분이 내려질 때까지 강제사직과 다름없는 긴 휴직 기간, 압류된 총기류와 신분증, 압류된 이름과 자아, 강요에 의한 심리 상담.... 상담사는 공감이라고는 말라 비틀어진-그래서 사실 시문에게는 더욱 편한- 지친 표정으로 권고했다.
'이시문씨는 보기 드물게 강한 자아관을 갖고 있군요. 그렇지만 전문가로서 되도록 피해자... 아니, 인질강도범이었으니 당신에게는 범죄자였겠지만, 그자와 선배 형사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말고 접근하지도 않는 게 좋겠네요. 알아봤자 좋을 것 없잖아요? 주형사는 어차피 퇴직할 예정이니까요. 이시문씨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현장에서 일어난 일은 그 사람이 선택한 길이니.... 아니, 말이 너무 많았군요.'
경찰청 소속 상담사는 그 까끌하고 텅 빈 눈으로 의미없이 웃었다. 젊은 여자인데도 모든 기쁨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테스트 결과 이시문씨는 굳이 제가 말 붙이지 않아도 잘 추스르시겠네요. 후회 없으시죠? 그럼 됐죠. 그거면 충분해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마지막으로 건강 종합검진을 위해 하루 입원한 시문을 찾아온 금반장은 한참 말이 없었다. 졸지에 직속 부하 둘이 사고를 친 셈이라 그 또한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고초를 치르느라 한결 꺼끌한 모습이었다. 줄담배를 병실 안에서 몇 가치를 물었던 걸까. 뒤늦게 어색하게 창문을 들쳐올려 손부채를 치면서 금반장은 시문과 시선을 피하며 그냥 무겁게 그 한마디만 했다.
'새로 태어난 셈 쳐라.'
지금은 고되어도, 너만 한결 같으면 언젠가는 위에서 알아줄 거다, 라고 더듬거리며 말이 덧붙었다. 내가 이런 꼴로 위에 올라가서 뭐 합니까 하며 웃었어도 금반장의 굳은 옆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손가락 틈새로 쓰디쓴 냄새를 내며 싸구려 담배가 타 들어갔다. 발포 후 코를 마비시키던 연기처럼. 금반장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바깥만 쳐다보다, 진저리 치며 내뱉었다.
'...독한 새끼...!'
벌써 3년 반이나 지났다 한다.
산자에게도 망자에게도 짧지 않은 시간이다. 문득 시문은 복잡한 상념에서 꺠어나 고개를 쳐들었다. 뚜르르륵, 이어지는 통화연결음에 그는 숨을 짧게 들이키며 정신을 차렸다.
관계자 대부분이 번호도 바꾸고 심지어 주소도 바꿔버려 얼굴 마주하기 힘든 이 와중에 그나마 연결되는 전화가 남아있다는 자체가 희망적인 신호였다. 이게 누구였더라. 급하게 메모를 확인하다 말고 시문은 시선을 멈췄다. 여자 이름이다. 두 사람과 잘 알고 지내던 동창 중에서도 정말 드문 여자. 그렇다면 혹시. 심리상담사의 권유로 끊어냈던 그들에 대한 단서를 3년이 넘은 지금 와서야 본의 아니게 연결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동공이 커지고 심박수가 조금 빨라지는 걸 느끼며 시문은 등을 곧게 폈다. 곧이어 차분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누구세요."
"이소미 씨 맞습니까?"
몸에 배인 형사의 말투를 그쪽에서 냄새 맡은 것 같다. 잠깐 틈을 두고, 경계를 세운 조심스러운 음성이 또박또박 뒤이었다.
"네... 맞는데요. 그쪽은 누구시죠?"
천천히 말을 돌려 핵심에 접근해 갈 여유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시문은 반사적으로 그 3년 간 속에 묵혀두고 있던 질문을 고스란히 끄집어내고 말았다.
"이시문 형사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곧바로 여쭤보겠습니다. 안나현씨 기억하시죠? 임채환씨 약혼녀였던. 그분과 친구시라고 들었습니다...."
연결고리가 하나 더 늘어난다고 기실 달라질 건 없었다. 심연은 깊고도 넓은데, 그 새까만 핵심을 향해 드리워진 사다리가 길어봤자 얼마나 가겠는가. 그럼에도 이소미라는 여자는 순순히 만나자는 청에 응했고 그것만으로도 시문은 암흑의 입구를 헛되게 비출 수 있는 등불을 손에 넣은 셈이었다.
시내에서도 구석진 낡은 다방에서 만난 이소미는 전화 음성을 판에 박은 듯이, 지친 회색 느낌이 나는 평범한 30대 중반 여인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비교적 솔직하고도 담백하게 시문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을 했다.
"그래요. 사실 누가 봐도 불행한 결합이었죠. 허풍 세고 노름질, 도벽에만 도가 튼 건달,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 남자 하나만 보고 사는 여자. 빤한 것 아니겠어요."
주경준과 임채환, 혹은 그의 약혼녀에 대해 떠오르는 대로 말해달라고 하니 그녀가 말문을 튼 첫마디는 그렇게 아픈 부분부터 꿰뚫고 있었다.
"뜯어 말렸죠. 누가 안 그랬겠나요. 아, 모르시겠구나. 나현이가 여고생 때 얼마나 이뻤는지. 성격도 좋고 착해서 얼마나 주변에서 사랑받았는지. 왜 그런 애가 그따위 싸구려 연애에 취했는지 지금도 알 길이 없어요. 틈만 나면 말했지요. 괜찮다, 서울 간 형사 친구가 그 사람 잡아줄 거다. 채환이도 곧 정신차릴 거다. 올라가서 형사 친구랑 같이 자취하면서 장사하면서 터 잡고 자길 부를 거라고."
한참 말이 없었다. 색바랜 커피숍 창밖으로 내다보는 눈길이 멀건하다. 문득, 그때 그 공허해보이던 여자 상담사라면 오히려 이 여자에게 더 관심이 쏠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튼 잡념이다. 시문은 피식 웃으며 고속도로 휴게소 자판기 커피보다 못한 시커먼 맹물을 한모금 마셨다. 이소미라는 여자가 갑자기 말했다.
"잠깐 나가서 걸을까요."
하천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좁은 개울 위에는 번듯한 다리가 놓여 삼삼오오 사람들이 오가고 자전거가 벨차임을 울리며 행인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동지와 입춘도 지났건만 2월의 겨울 오후는 짧다. 벌써 햇빛에 붉은 기가 돌며 그림자가 길게 흐느적거리며 기묘한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개울에서 불어오는 이끼 냄새가 묻어 있었다. 어릴 때 시골에서 익숙하던 유년의 향취라 시문은 깊게 심호흡하며 알싸한 겨울 막바지의 공기를 들이삼켰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영원히 침묵할 것 같았던 그 여자가 다시 불쑥 말을 이었다.
"결혼할 거라고 했어요."
돌다리 한가운데 멈춰서서 난간에 손을 짚은 채 이소미는 곰곰히 3년 넘게 묵은 기억을 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엉클어진 기억의 실타래는 오래 잊혔던 만큼 한번 풀리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오는 듯했다. 최소한 시문이 이해한 바로는 그랬다.
"오늘이 며칠이죠? 12일? 2월 12일, 13일 그 정도 아니었나요? 옛날에 나현이가 결혼할 거라면서 그랬어요. 기왕이면 발렌타인의 신부가 되고 싶다고.... 우습죠. 걔가 원래 그런 면이 있었어요. 편부 슬하에서 힘들게 자라서 그런지 남들 보기엔 낯부끄러운 낭만이라던가 행복에 집착했어요. 그래서 더 그 못되먹은 남자에게 못 헤어났지 싶지만서도. 그런데 말이죠. 겉보기로는 저도 속았어요. 정말 부러울 지경이었거든요. 안나현... 나현이가 중학생 때부터 예쁘장했다고 말했죠? 그래서 주경준하고 임채환이 놓고 다투다가 주경준이 깨끗이 포기하고 서울로 갔단 소문도 있어요. 제가 봐도 그런 것 같더라고요."
시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그녀의 과거 속에서 풀려나와 격류에 휩쓸리는 감정의 실타래에 제지를 걸 필요는 없었다.
"임채환이가 강도짓하다 인질 잡았을 때 주경준이 굳이 나서서 칼받이 했다죠. 왜 그랬을까. 임채환은 죽어 마땅했어요. 주경준도 거기서 그만 뒀어야 했는데. 퇴원하고 자기도 멀쩡한 몸이 아니면서 안나현에게 갔대요. 죽은 임채환 대신 끝까지 돌봐주겠다는 약속을 했다나.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하시겠지만 진짜예요. 제가 나현이 남동생에게 직접 들은 얘기니까. 남동생 말하길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겠다더만요. 그게 무슨 망신살이냐고요."
"그래서, 주형사가 사직하고 여기 내려와서 안나현씨를 데려갔다는 겁니까?"
"네, 맞아요. 지병까지 발작해서 시체 같은 꼴이 되서는 고집을 피우더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나현이가 몰골이 성했느냐 그것도 아닌데. 생각해봐요. 약혼자가 강도짓하다 죽고 옛 남자친구도 반폐인이 되어 버렸잖아요. 그게 한꺼번에 일어났다고요."
한꺼번에, 총알 한 방에. 시문은 무감각하게 생각했다.
바로 이 손으로.
말하다 보니 오래 죽이고 있던 감정의 도화선이 한꺼번에 불붙었는지 그녀의 음성이 점점 더 격앙되고 있었다.
"그 뒤는 묻지 마세요. 저도 몰라요. 주경준도 재활치료해야 하는 몸인데 도망쳐 나와서 나현이를 데리고 숨었대요. 그리고 소식이 없대요. 나현이까지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도 들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요? 내가 더 알아야 하나요?"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이소미는 얼굴을 가렸다. 천천히 키가 줄어들기라도 한 듯 무릎에서부터 주저앉으며 작게 아주 작게 시문 앞에 웅크렸다. 눈물이 한 방울 돌다리 위로 뚝 떨어졌다. 억누른 웅얼거림이 목구멍 안으로 사그라들었다.
"그러니까... 왜 그 여자였어.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왜 나는...."
시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뜨문뜨문 떠가던 구름이 붉고 노란 빛을 머금으며 낙하하기 시작했다. 강물은 여전히 고요히 흐르고, 불청객처럼 선 건물에 난반사 된 녹슨 듯한 땅거미가 지평선으로 퍼지고 있었다. 자신의 몫은 자신의 몫. 괴로워하는 그녀의 몫은 그녀의 몫. 시문은 조용히,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확인하고 싶었다. 그걸 위해 이곳까지 내려왔던 거다. 뒤엉킨 수수께끼를 맞춰 줄 최후의 한 조각이다. 묵묵히 듣던 그녀는 시문이 던진 질문에 소리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가 나무라는 듯한 시문의 눈길에 겨우 말로 확인을 해 주었다.
"네, 맞아요. 말씀한 그대로예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 이소미는 달고도 쓰디쓴 옛 기억을 추회하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돌다리 너머 햇빛이 반짝거린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나현이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어요. 그 남자가 강도짓 한 것도 나현이 음악 학원 차려주겠다고...."
-- 모님이 보시고 '선배 변했다' 이 대사가 아침 불륜드라마 같다고 하셔서 대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