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했습니다.
특영 텐카시문/시문텐카 위주로 돌아가는 티스토리 : http://astorrr.tistory.com/
옛날 텐시/시텐 연성들 : http://tensi.postype.com/
옛날 특영 그림/감상 블로그 : http://blog.naver.com/sleep_less
@astor19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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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터 발렌타인 5편
본래 비좁은 방인 데다 협탁이며 책상, 의자까지 나뒹굴며 알맞게 발치에 걸리적거리는 탓에 어차피 서로 간에 움직일 수 있는 범위와 동작이란 뻔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맞지도 않는 몸을 입고 뻣뻣하게 움직이는 주경준보다는 텐카 쪽이 약간 우위에 선 셈이다. 거대한 검을 휘두를 공간을 만드는 게 쉽지만은 않았지만. 벽과 천정에서 수많은 부적이 파르륵 떨었다. 칼날이 허공을 베고 푸른 빛이 얽혔다가는 마찰음과 함께 떨어졌다. 짧고 격한 마주침 끝에 주경준이 손을 크게 내뻗었다.
텐카의 머리를 노리고 가늘고 날카로운 전뇌가 떨어졌다. 그를 피해 몸을 뒤로 물리는 동시에, 텐카는 자신이 박차고 들어왔던 방문 바깥으로 뛰었고 어깨부터 바닥을 굴렀다. 곧바로 퉁겨 일어나자마자 한결 여유로워진 거실 공간에서 밑으로부터 위로 끌어올리듯 검날을 베어올렸다. 쉭 하는 가늘고 시린 소리, 어둠이 달의 흉처럼 갈라져나가며 붉은 빛이 쏘아져 나갔다. 아직 시문이 못 빠져나온 좁은 침실을 향해 불꽃의 해일이 소용돌이치며 밀려나갔다. 컴컴한 방 안쪽에서 솟구치는 빛, 바닥이 드드드득 떨리는 약한 진동과 함께 붕괴음이 들렸다. 어둠이 터져나갔다. 일순 텐카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검을 내휘두른 자세 그대로 크게 치켜뜬 눈을 정면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부적의 결계와 영파가 부딪쳐 만들어낸 희부연 안개가 흘러다녔다. 얼어붙은 듯한 냉기가 퍼졌다. 그 틈을 뚫고, 침실 너머 어둠 속에 푸르스름한 빛이 파스락, 라이터 불빛처럼 작게 솟았다. 서서히 사람의 형체가 문 사이로 나타났다. 가느스름한 전뇌를 손 주변에 두른 채 주경준의, 시문의 모습이 걸어나오고 있다. 검은 머리와 무리진 백발이 헝클어지고 얼굴에 핏자국이 말라붙은 채로.
그가 표정없이 텐카를 내려다보았다. 한겹 막이라도 씌운 듯 낯선 붉은 기가 감도는 시문의 두 눈이 갑자기 슥 웃었다. 입가는 또다시 깔보듯 음험한 인상으로 일그러졌다. 텐카 역시 마주 웃었다. 멀쩡한 모습을 확인하자 겨우 안도한 듯, 한편으로는 또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그가 다시 몸을 한껏 낮춰 검을 쥐고는 중얼거렸다.
"웃지 마, 졍들어."
기분 더럽다는 의미였다. 아주 많이. 여유 부릴 틈 따위는 없었다. 주경준은 조금씩 살아있는 인간의 몸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이보다 더 자유롭게 장악하게 된다면 자신의 승산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게 되면 시문의 빙의 상태를 풀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사람.... 아니, 텐카는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다. 결코 '그녀'의 힘을 빌릴 수는 없다. 시문의 과거를 알면서 접근해 온 여자, 침묵하고 있던 여자. 결코 그 여자를 신뢰할 수는 없다. 텐카는 입을 꽉 틀어다문 채 그녀의 가능성을 아예 머릿속에 지워없앴다. 벼랑을 등진 것처럼 정신을 집중했다. 기회는 한번이다.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간 시문의 몸이 흔들거리며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텐카는 칼끝까지 숨을 조절하며 전신을 곤두세워 거리를 가늠했다. 그리고 순간, 놓치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몸 전체로 끌어올리듯, 검을 반원으로 휘둘렀다. 쏘아져나간 붉은 불길이 허공에서 푸른 전격과 맞부딪쳐 거대한 울림을 내뿜었다. 잠시 그에 정신을 빼앗긴 주경준은 팔을 들어 반동에 맞섰다. 옷자락이 어지럽게 들어올려져 나부끼고 이시문의 마른 장신이 뒤로 무게중심을 두어 꼿꼿하게 버텨냈다. 문득 주경준은 눈앞의 텐카가 있어야 할 위치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사각인 옆에서부터 치고 들어오는 그림자를 보았다.
"놀아볼카." 밤의 짐승처럼 새까만 음영 속에 붉은 두 눈만이 번득이고 있었다. 은백색 칼날을 타고 불길이 내달려왔다.
분명 그 움직임으로는 이번 공격을 피할 수 없다. 불길이 화염의 고리처럼 번져왔으나, 그자는 우두커니 선 채 시문의 눈으로 흘긋 올려다 볼 뿐이었다. 도저히 피할 구석이 없다. 이제 끝났다, 고 텐카는 오래 단련해 온 자신의 감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 무방비로 서 있던 시문의 손가락 끝이 까딱 움직였다.
갑자기 텐카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번득 비치는 푸른 빛과, 등줄기를 훑는 저릿한 한기를 동시에 느꼈다. 공중에서 공격하느라 마찬가지로 무방비인 그의 등뒤에서 커다란 전뇌와 빛의 덩어리가 벼락처럼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텐카의 눈이 경악으로 굳었다. 빠르다. 시문이 평소 다루던 것에 비해 비교할 수도 없이 조작이 능하다.
더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쾅, 눈앞이 푸르게 물들고, 등을 강타하는 충격과 함께 텐카는 거대한 손에 내팽개쳐지듯 바닥으로 던져졌다. 칼을 놓친 채 팔이 꺾이며 온몸이 엉망으로 구르고 쓸려, 가재도구 사이로 쳐박혔다. 동시에 시문의 몸도 텐카가 쏜 붉은 영파에 휩싸여 뒤로 나뒹굴었다. 요란한 소리와 튀어오르는 붉고 푸른 빛의 파편.
그리고 잠시 후, 정적과 더불어 어둠이 돌아왔다. 고요하고 물처럼 가라앉은 자리에 달빛이 다시 괴괴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유리조각이 깔리고 탁자와 소파가 밀린 가운데 죽은 듯 엎드려 있던 텐카의 어깨가 약간 움직였다. 막혀있던 숨이 터져나왔다. 그는 꿈틀거리며 몸을 뒤챘고, 잠시 누워있다가 남은 힘을 쥐어짜 일어나 앉았다. 팔뚝부터 허벅지까지 유리와 플라스틱 파편에 긁혀 옷 위로 피얼룩이 점점이 배어나오고 얼굴도 쓸려서 엉망이지만, 어떻든 간에 살아있긴 했다. 그는 짜증나는 듯한 신음을 길게 흘리며 벽에 뒷머리를 기댔다. 그 작자는? 제대로 뜨이지도 않는 눈을 들어 바라보자, 거실 저편에서 그도 소리없이 천천히 일어서는 중이었다.
셔츠 끝이 너덜너덜해진 채 이시문의 등이 꼿꼿이 섰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꺾어 조금도 변화없는 얼굴로, 완전한 주경준도 완전한 이시문도 아닌 해쓱한 무표정으로 텐카를 돌아보았다. 쳇 하고 텐카는 혀를 찼다. 손바닥으로 문질러 눈안에 흘러든 피를 닦아냈다. 이제 좀 시야가 또렷하게 보인다. 그리고 시문이 고요하게 조금 기울어진 듯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걸 쳐다보았다.
문득 그 발치에 무언가가 카랑 하고 걸렸다. 텐카의 검이었다. 맥동치듯 붉은 용의 영파를 내뿜으며 시문의 발 근처에 뒹굴고 있었다. 텐카는 자꾸 흐려지는 시야를 유지하려 애쓰며, 시문이 허리를 굽혀 검을 집어드는 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문의 손길이 닿자마자 해무리처럼 일렁거리던 불꽃의 영파는 순식간에 빨려들듯 사그라지고 다시 용이 휘감은 장식이 달린 싸늘한 검으로 돌아갔다.
시문은 그대로 검을 들어 반원을 그리듯 텐카 쪽으로 휘둘렀다. 가볍게 허공을 베며 미끄러진 검끝이 텐카의 목에 와 닿았다. 그 싸늘한 촉감에 더해 피부 한겹이 슬쩍 베어져나가는 선득한 감각이 더했다. 시문은 거기서 정지했다. 텐카 본인조차 가끔 버거운 무게였는 데도, 시문은 등을 편 채 아무 무게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으로 한손에 쥔 검을 곧게 내뻗고 있었다. 흐르듯이 어깨에서부터 허리, 다리, 균형을 잡기 위해 약간 뒤로 물린 한쪽 발목까지 이어지는 선 자체도 한 자루의 잘 벼린 검 같다고, 텐카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잡념을 품었다. 그는 픽 웃었다. 눈을 내리깔며 내뱉었다.
"칼, 잘못 쥐어써. 손 방향이 반대쟈나."
물론 상대가 고맙다고 검을 제대로 고쳐쥘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게 망령을 자극하긴 한 듯, 반응이 왔다. 시문의 몸이 허리를 틀어 검을 놀리자, 어둠 속에 쉭 소리를 내며 은백색 궤적이 그려졌다. 텐카의 복부를 가볍게 일직선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눈을 찌푸리며 긁힌 곳을 눌렀다. 시문은 입을 열지도 않은 채로 주경준의 목소리만 거칠거리며 들려왔다.
'조금만... 더 밀어붙였으면 성공했을 텐데. 계속 공격에 망설임이 생기더군. 애썼는데 아깝게 됐다.'
"아, 들켜쏘? 칭챤해줄게. 아죠씨야말로 훈늉하세여. 싀문씌도 못 다루는 피카츄 능룍 아주 잘 쓰먹던데?"
'자기 잠재능력을 제대로 쓸 줄 모르더군. 상관없다. 어차피 저승 가면 쓸 필요도 없는 능력이지.'
텐카가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이번엔 진짜 베겠다는 양 다시 칼끝이 목줄기로 들이밀어 왔다. 달빛을 받아 깎아낸 듯 흐르는 시문의 윤곽. 길게 번득이는 검 너머로 시문의 풀어진 채 크게 열린 동공이 텐카를 마주하고 있었다. 텐카의 눈앞에서 시문의 다른 한 손이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손 사이로 스피릿이 소용돌이치며 모이기 시작했다. 빛나는 푸른 전격의 덩어리가 강렬하게, 타오르듯 맺혔다. 텐카의 등이 튕기듯 꼿꼿해졌다.
그 상태 그대로 주경준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텐카에게 공격을 가하는 대신, 그 손을 그대로 자신 쪽으로 돌렸다. 시문의 헤쳐진 옷깃 새 드러난 가슴 윗부분과 목 사이로 향했다. 둥글게 모았던 손가락을 펼치는 동시에 샛푸른 빛덩어리가 이시문의 몸에서 터져나갔고, 그의 머리 전체를 삼켜버렸다.
번쩍, 빛과 굉음. 총이라도 맞은 듯 시문의 상체 전체가 뒤로 크게 젖혀지고 다리가 꺾였다. 텐카의 두 눈이 핏기를 품고 크게 벌어졌다. 반사적으로 뛰쳐나갈 듯 전신이 긴장을 머금어 딱딱하게 곤두섰다.
영원 같은 몇 초가 흘렀다. 시문의 몸은 휘청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차츰차츰, 다시 균형을 잡으며 상체가 끈으로 조종당하듯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머리, 얼굴이. 그다지 타격받지 않은 듯한 머리가 마지막으로 앞으로 숙여오며 텅 빈 눈을 텐카에게 맞췄다. 텐카는 얼어붙었던 심호흡을 내터뜨리며 뒤로 털썩 기댔다.
"카... 캄착이야. 아죠씨, 나 진차 캄놀했쟈나. 그츰으로 싀문씌가 당할 리 업찌만 정말 촐았다그."
'어째서?'
주경준이 무감각하게 중얼거렸다. 시문의 잠재된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힘은 시문 본인에게는 듣지 않았고, 오히려 신체는 더 다루기 어려워졌다. 아니, 방금 전 타격으로 도리어 시문의 의식을 일깨우기라도 했는지 안에서 밀어내는 반발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주경준은 남은 힘을 다 해 다시금 검을 텐카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등뒤로는 손을 뻗어 베란다로 향하는 유리문을 밀어열었다.
'방법은 많다. 여기서 추락하면 이 몸뚱이는 어떻게 될까. 불에 태우거나 물에 빠뜨리거나 질식시키면? 이 칼로 벨 수도 있지. 이 몸도 인간인 이상....'
"해 볼 테묜 해 바."
묘하게 침착을 되찾은 어투로 텐카가 내뱉었다. 그는 장단이라도 맞추듯 고갯짓을 까딱거리며 덧붙였다. "저기 가스도 이꼬, 욕실도 빌려줄케. 불 부쳐 줄카? 목 매달료묜 넥타이도 차자줄케. 섹쉬하겠네. 근데 아죠씨... 그런다고 그가 호랑호락 당할 줄 알아여?"
킬킬거리는 웃음이 퍼졌다. 갑자기 그 웃음이 그치더니 붉게 치켜오른 눈이 번득 날을 세웠다.
"네놈은 아직도 이시문을 몰라."
분개한 주경준이 떨치듯 전뇌의 스피릿을 내리꽂았다. 펑 터지는 푸른 빛에 얻어맞고 텐카는 다시 벽에 쳐박혔다가 나무토막처럼 옆으로 고꾸라졌다. 단번에 숨통을 끊을 작정이었는데 확실히 위력이 줄었다.
'건방지게....' 시문의 얼굴로 주경준은 눈을 한껏 부릅 뜬 채 손을 들여다보았다. 텐카의 도발을 받아 그런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초조감이 주경준을 휩쌌다.
'방해하지 마라!'
붉게 물든 망령의 눈에 발작 같은 분노와 적대감이 어렸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이 몸을 융합할 필요가 있다. 잠시라도 좋으니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지배하기만 하면 된다. 혼란에 빠진 채 주경준은 시문의 내면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더 아래, 더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더 깊은 곳의 이시문에 접촉하고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
그자가 자신의 의식을 접고 시문의 안쪽으로 후퇴하자 주변에 떠돌던 전뇌의 스피릿이 꺼져들었다. 깜박이는 부적의 희부연 노란 빛만 남긴 채 주변에 어둠이 밀려들어 시문을 에워쌌고, 허공을 부유하듯 그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줄이 풀린 인형처럼. 고개가 뒤로 힘없이 늘어지더니, 이윽고 눈이 감겼다. 마침내 걸려들었다, 라고 텐카는 직감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힘껏 내밀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
"일어나, 싀문씌!"
그 고함이 시문 안에 잠든 종을 울렸을 지도 모른다. 깊은 심연 속으로 침입을 시도하던 망령은 거미줄에 걸린 듯 덜컥 사로잡히고 말았다. 텐카의 두 눈에 시문의 어깨가 크게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와 함께 망령이 쇠를 긁는 것처럼 분노에 찬 소리를 지르는 것도.
'<i>......!</i>' 갑자기 그의 전신이 싸늘한 월광 같은 푸른 빛에 에워싸여 빛나기 시작했다. 시동하듯, 늘어져있던 시문의 손가락 끝 하나하나가 힘을 되찾으며 하나씩 구부러 들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듯 그의 옷자락이 일순 위로 펄럭이며 날렸다. 짧은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쓸며 여기저기 나부꼈다. 여전히 그의 입술이 굳게 닫힌 채였으나 텐카의 귀에는 잡아찢는 듯 망령이 부르짖는 외침이 쩡하니 울렸다. 유리창이 드득거리며 떨었다.
마침내 감겨있던 시문의 눈이 열렸다. 그 유빙 같은 동공 깊은 곳에서부터 푸르스름한 광채가 폭발하듯 넘쳐났다. 번쩍, 하고 이윽고 온 집안을 휩쓸어버릴 듯한 빛의 광풍. 텐카는 고개를 돌리며 눈앞이 멀어버릴 것 같은 그 섬광을 피했다.
온통 푸르게, 물들었다. 그가 돌아오는 각성의 빛.
덜덜대던 유리의 진동이 멎었다. 빛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텐카는 눈을 뜨자마자, 무릎으로 기다시피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팔을 벌렸다. 그리고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는 시문의 몸을 때맞춰 두 팔 안에 받아안았다. 체중이 쏠리며 몸이 한쪽으로 기울고 두 사람의 팔다리가 얽히고 나뒹굴면서도 끝까지, 텐카는 그를 놓지 않고 어깨를 굽혀 한껏 감쌌다.
억눌렀던 거센 호흡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돌아오라 부르는 소리. 그의 숨결, 부둥켜 끌어안은 팔을 느낀 시문이 유리알처럼 멍하니 허공에 고정시키고 있던 눈을 돌렸다. 그리고서야 천천히, 매우 목이 마른 듯한 목소리를 냈다.
"텐카씨...?"
텐카는 확실히 그 음성을 알아들었다. 갑자기 맥이 빠져서 그래서 대답 대신 웃기 시작했다. 이시문이 맞다. 그와 함께 나란히 앉아 끊겨버린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침묵하고 싸고 쓴 와인을 나눠마시던 그였다. 아주 속을 다 비워내겠다는 듯이, 쉬어터진 소리로 웃고 또 웃으며 시문에게 두른 팔에 힘을 줬다.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뭐라 말하려다 말고, 시문은 그를 그저 그렇게 내버려두었다. 마비된 것처럼 감각이 없는 손을 올려, 머뭇거리듯 텐카의 붉은 머리카락 사이에 넣고 쓸었을 뿐.
안개가 끼어 흐릿하던 의식이 돌아오며 주경준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몇가지 토막난 영상이 기억 속에 확 되살아났다. 마치, 악의와 살기로 뭉친 흉측한 덩어리가 되어 깊은 어둠 속에서 그자를 잡아찢고 태워없앤 것 같은 기분. 시문은 흠칫하여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실 한구석에 새까만 악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텐카씨." 좀전과는 다른 어조로, 경고하듯 텐카를 불렀고 그 덩어리를 쏘아보았다.
최후의 힘을 다해 그 덩어리는 매우 희미하고 불투명한 사람 그림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음울하고 나이 들고 지쳐보이는 주경준이 어둠으로부터 일어나 섰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공허하고 컴컴하게 뚫린 두 눈. 그는 망자의 눈으로 한참이고 시문과 텐카를 먹먹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안에 든 게... 대체 뭐냐.'
시문은 경계 태세로 상체를 폈다. 그동안 텐카는 팔을 뻗어 바닥에 구르던 자신의 검에 손끝을 걸었다. 그러나 이미 주경준은 발치에서부터 연기처럼 부서져나가는 중이었고, 형체와 함께 힘과 의지마저 잃고 있었다. 거역할 수 없는 소멸이 그를 부르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꺾이지 않는 시선으로 시문을 똑바로 쳐다보는 채였다.
'어두운 구멍... 너무 짙은 어둠. 너무 많고, 너무 오래 되고, 너무 지독한 것들. 그것들은 뭐지.... 대체 네놈은 뭐길래 그런 걸 품고 있지...?'
혼잣말 하다 말고 그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생각할 힘마저 사라지는 듯 그 냉소하는 움직임은 희미했다.
'아니.... 내가 아니어도 언젠간 네놈 스스로 먹고 먹힐 것이다. 네 적은 네 안에....... 오래지 않아.... 그러니 먼저 저승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우리 둘다 좋은 곳에선 못 만나겠지만....'
텐카의 눈가가 꿈틀하며, 끝장을 내려는 듯 검자루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시문은 그를 가로막아 만류했다. 대신 시문은 휘청거리면서도 제대로 일어나 섰다. 고개를 반듯이 세우고는, 손을 들어올려 깎은 듯이 경찰식 경례를 보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최후의 배웅은 해야 할 것만 같았기에. 그를 돌아보는 주경준은 이미 눈코입도 분간이 안 될 만큼 어둠으로 녹아내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문의 경례에 조금 어이가 없는 듯이 코웃음치는 모습에서, 시문은 아주 잠깐 그의 원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마지막 자존심인지 내뱉는 그의 마지막 한 마디가 또렷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간다, 이시문 후배.'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그는 거침없이 똑바로 걸어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계속 부스러지던 그의 먼지 같은 잔재가 쿵 하고 닫힌 현관문 너머로 끊기고, 잠시 그 자리에서 맴돌다가 바스락 하고 휘날렸다. 시문은 계속 눈으로 그의 자취를 좇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사로잡았을 때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죽은 사람 특유의 미련으로 가득 차 어둡고 컴컴하고 추운 감각들. 그 와중에도 단 두가지 영상만은 또렷이 지금까지 뇌리에 새겨진 채였다.
한 남자가 보인다. 그는 허름한 요양원 침대에 누워있다. 바싹 마른 채, 양볼은 홀쭉하고 꺼칠해져서는 호흡기를 코에 끼우고 있다. 불규칙하게 부풀다 가라앉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남자가 끝까지 가슴에 품고 있던 모습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 촘촘하고 따스하고 기분좋게 내리쬐는 빛 속에서 밀짚모자를 쓴 한 여인이 돌아보고 있었다. 단지 그것 뿐. 흰 원피스 자락을 날리며 말도 없이 웃는 여인의 모습 뿐.
결이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햇빛과 갈색으로 어우러지며 그녀는 입모양만으로 뭐라고 말했고, 곧 수줍은 듯 웃으며 멀어지기 시작했다. 한순간 확 다가들었다 다시 가 버리는 그녀는 추억 속에서 너무도 아름다워서. 아주 짧은 순간에도 애틋함으로 가득 차서. 자신도 모르게 불렀다. <i>나현아.</i>
시문은 숨을 삼켰다.
바닥에서부터 부드러운 재처럼 검은 기운이 불어 오르더니 시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어두운 기운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변해 시문의 눈동자로 빨려들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갔구나. 시문은 일순 흠칫하며 몸서리쳤다. 손으로 막듯이 자신의 눈을 가리고 덮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텐카의 팔이 뒤에서 뻗어와, 눈을 가린 채 약하게 이를 악무는 시문을 감싸안았다. 마침내 그의 어깨가 포기하듯 늘어지고, 손가락 틈새로 그 푸른 눈이 이미 부서져버린 망령을, 그자의 삶과 기억을 모두 집어삼킬 때까지.
"싀문씌."
낮게 불러보았다. 이 악몽 같은 밤에서 처음으로 반응이 돌아왔다. 시문은 아주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눈가로부터 손을 끌어내렸지만 여전히 시선은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다. 텐카는 억지로 그 얼굴을 잡아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머리카락 새로 벌어진 두 눈은 평소보다 더 금속적인 푸른색으로 형형하게 물들어 소름끼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구잡이로 부서지고 깨지고 어질러진 집안, 새벽 직전의 가장 짙은 어둠이 거실을 점령하고 있었고 달빛은 너무 약한데 새벽은 멀었다. 피범벅이 된 얼굴과 머리카락, 생채기 나고 잡아뜯긴 몸의 상처와 말라가는 피얼룩과 비린내는 별 것 아니다. 자고나면 잊어버리는 시시한 악몽 같은 거다. 먼저 입을 연 건 시문 쪽이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텐카씨."
"알아."
"그렇다고 잊을 순 없죠. 몰랐다면 변명이지만 이제 알게 된 이상. 짊어지고 살아갈 겁니다. 평생. "
"알아."
알아. 텐카의 팔이 시문의 뒷목덜미를 받치듯 끌어당겨 고개를 가까이 가져갔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상대를 원해 가볍게 맞닿았다 떨어졌다. 몇번을 그렇게 호흡을 확인하고 체온을 전하고 전해받으며, 아침을 피해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처럼 입술을 맞댔다. 그러다 말고 서로의 엉망진창인 몰골을 다시금 확인하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문이 자조하는 투로 내뱉었다.
"피냄새 나는 발렌타인이네요."
"원내 성순교일이니카 피냄새 나는 게 당욘한 거야."
마치 붉은 귀신들 같다. 손을 내려 시문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텐카가 한참만에 억누른 소리로 속삭였다.
"...만져도 대...?"
시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손으로 자신과 닮은, 자신과 닮은 붉은 귀신의 얼굴을 감싸 가까이 가져왔고 입술을 포갰을 뿐이다. 혀가 파고들어 닫혀있던 입술 깊은 안쪽에서 따뜻하게 섞였다. 혀끝에서 부드럽고 애틋한 불꽃이 일었다.
-- ..........쓰다가 중간에 생각났는데 영파가 아니라 스피릿이란 용어가 있다는 걸 자꾸 까먹어요orz
-- 그냥 시문에게 저 용돌돌 칼 들려주고 싶어서 이따위 복잡한 상황이 됐다는 건 비밀.
-- 허락 받지 못 해서 그간 건드리지도 못 한 고자 멍게씨....
-- 다음 완결편은 포스타입으로 옮겼습니다. http://tensi.postype.com/
-- 이후 이야기도 포스타입에 전연령 버전으로 공개할 예정입니다.
-- 종종 특영 잡담 올릴 트위터 : @astor19k
-- 특영 위주 네이버 블로그 : http://blog.naver.com/sleep_less
비터 발렌타인 4편
'힘드냐, 신참?'
부르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어올리고서야 시문은 자신이 보고서를 작성하다 말고 졸고 있던 걸 깨달았다. 팔꿈치 밑에서 서류가 구겨지고 손은 펜을 쥔 채 비뚤어진 선을 죽 긋고 있던 중이었다.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삐끗하기 직전에 깨워준 모양이다. 시문은 슥슥 눈가를 부빈 후 다시 허리를 폈다.
'아뇨. 그냥 좀 며칠 피곤이 쌓였나 봅니다.'
'쉬엄쉬엄 해라. 새빠지게 일하고 뼈를 묻어도 아무도 안 알아준다.'
싸구려 캔커피를 불쑥 내미는 그의 옆모습은 오랜 형사 생활로 다져진 듯 쓸데없는 여분의 표정 하나 없이 굳고 울퉁불퉁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그야말로 형사 그 자체인 인물로 보였다. 늘 말수도 적고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으며 그저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하는, 오히려 인간관계를 험하게 다루는 면이 있어 보여서 가까이 하기 힘든 인상이었다. 시문도 신참으로 들어와 6개월 가량 이리저리 구르고 부대끼면서도 정작 이 선배와는 거의 말을 섞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먼저 말을 걸고 캔커피까지 건네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시문은 조금 어색하게 커피를 받아들며 자기가 생각해도 붙임성없이 인사했다.
'네. 감사합니다.'
'너무 초반에 힘 뺄 필요 없어. 지금이야 멋모르고 힘도 넘치고 사명감이니 정의니 그런 게 자랑 같아서 무리하지만 나중엔 남는 거 하나 없단 소리다.'
저는 딱히 그런 것 없습니다 라고 불쑥 나올 뻔했으나 한참 선배에게 말대꾸하는 식이 될까봐 적당히 네 하고 받아주며 캔커피를 마셨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시문을 한참이나, 불쾌감이 느껴지진 않지만 뭔가 뜯어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며칠 수염을 안 깎은 턱을 문지르며 혼잣말로 생각을 정리하는 양 중얼거렸다.
'하긴, 너처럼 희한하게 생겨먹은 녀석이 오히려 적성일 지도 모르지. 천직인 줄 알고 미련하게 파던 나보다는.'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후줄근한 양복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시문에게서 멀어져 가며 역시 생각의 연장처럼 영문 모를 소리를 뇌까렸다. '음악 학원.... 나 같은 놈은 무리지. 그렇지.' 시문은 의아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은 캔커피를 홀짝거렸다.
그게 주경준이라는 이름의 고참 형사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눈 사적인 대화였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 후, 한동안 나이 든 형사들 사이에서는 주경준이 임채환의 범행을 사전에 들어 알고 있던 게 아니냐는 수근거림이 흘러다녔다. 소문이라는 게 늘 그렇듯 거품처럼 부풀어 올랐다가는 흔적없이 허무하게 꺼져갔다. 그리고 시문은 그 후로 아주 오래, 그 대화를 잊었고 의식적으로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시문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디선가 잘 살고 있으리라 마음 한구석에선 믿고 있었지만 결국은, 세상을 떴구나. 스산하고 고통받는 악령의 모습으로 이렇게 마주하고 보자 불현듯 그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공기가 차갑다. 주경준이 마비된 듯한 어조로 반복했다.
- 생각해 냈어.
망령이 되어서도 아직 대화할 만한 이성은 남아있는 듯하다. 반사적으로 머리로 판단하자마자 시문은 입안 가득 감도는 쓴맛에 어금니를 약하게 깨물었다. 그래도 한솥 밥을 먹는 동료이자 선배였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두고 악령화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그것부터 머릿속에 계산하고 있던 자신에게 넌더리가 났으나 지금 눈앞의 현실이 또 그렇다. 그는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자고 찾아온 게 아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며 시문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절제하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잊겠습니까."
짤막한 대답을 듣자 그자의 입매가 비뚤게 일그러졌다. 마음에 들었는지 혹은 비위에 거슬렸는지. 그 표정은 놀랍게도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에게도 속을 열지 않고, 내려다보는 눈을 한 형사 주경준. 그러나 친구에게 잘못된 식으로 의리를 지키고, 충격으로 정신을 놓았다는 여자에게 돌아간 주경준.
행방을 감춘 채 죽고나자, 모든 원점이 된 이시문을 찾아온 망령 주경준. 이상하게도 이렇게 되고나서야 시문은 주경준이란 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봤자 늦었다. 너무 늦은 이야기다. 차가운 공기가 등골까지 저리게 했다. 창문 너머 활처럼 휜 달빛이 냉정하게 눈가를 찔렀다. 내쉬는 숨결이 무게없이 흩어져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빚을 갚으러 오신 겁니까."
스산한 죽음의 냄새. 마른 꽃보다는 썩어가는 연못에 가까운 냄새였다. 망자는 여전히 굳은 턱 위로 비뚤어진 역한 웃음을 머금고는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 하고 짧게 뱉는 음색에 서서히 자근자근 씹는 듯한 분노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 죽어가면서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망자가 위험한 건 일직선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고, 예전에 소피아가 말한 적이 있었다. 힘든 사건 후, 본인은 다 잊고 용서하고 치유했다고 생각해도 그건 이성이 눈속임 한 거죠. 버티기 힘든 상처 앞에 진통제를 놓을 뿐이예요. 미처 없앨 수 없던 원한과 분노와 고통은 죽기 전 망자의 사고 속에서 터져나오고, 오래 억압했던 만큼 몇배로 무섭도록 부풀어 올라요. 안 그래도 사람은 죽으면서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하게 되고 생전 못 이룬 소망 따위에 집착하기 마련인데. 더불어 타인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 증폭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녀는 딱 하고 손가락을 울렸다. 경쾌한 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비정하리만큼 진지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악령이죠. 우리의 목표이자 싸워야 할 대상이기도 하고요.
크게 시문은 심호흡을 했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있는 건 없다. 되돌리겠다는 자체가 단지 집착이고 미련일 뿐. 숨을 쉴 때마다 바늘로 찌르듯 약하고 차가운 통증이 느껴졌다. 시문은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탓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주경준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리더니 주름을 잡으며 이지러졌다. 마치 비웃음처럼.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검붉은 불길을 받아 그는 초라한 잡귀신에서 점차 더 크고 강력한 존재로 자라나는 것만 같았다. 달빛이 새카맣게 먹혀들고, 손가락 끝이 저릿거린다. 그러나 시문은 가슴 속에 가시처럼 박혀있던 말을 끝까지 내뱉었다.
"주선배는 임채환을 막고 싶었겠지만 방법이 잘못 됐습니다. 당신은 잘못 된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마치 도미노처럼."
무엇이 투철한 형사였던 그의 눈을 가렸나. 안나현에 대한 오랜 연정? 그에서 비롯된 죄책감? 우정을 배신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 족쇄를 채운 임채환과의 관계? 그래서 임채환을 미리 말릴 수 없었고, 혼자 감당하며 혼자 몸을 던져 그를 막아내려 발버둥 쳤을 지도 모른다. 시문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를 비난할 자격이 없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시문 또한 자기자신의 생명에 책임이 있고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스스로를 포기하거나 저버리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것이 그가 그 사건 후로 비난과 고통 속에 내린 유일하고도 쓰라린 결정이었다. 그는 낮게, 속삭임보다 더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므로 선배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지금은. 전 그런 식으로 용서를 구하진 않을 겁니다."
주경준은 이제 꿈틀거리며 목을 뒤틀고 있었다. 얼굴이 괴이한 형태로 변해가며, 흙색으로 변해있던 팔에서 힘줄이 툭툭 튀듯 불거져 나오더니, 인간으로 보기 힘들 각도로 고개가 좌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올 것이 왔다. 시문은 가만히 올려다보며 아프도록 손을 움켜쥐었다.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자제력조차 잃어버린 주경준이 길게 찢어진 입으로 고함을 토해냈다. 두 팔이 사신의 낫처럼 기괴한 형체로 꺾이더니 위로 한껏 치켜 올라갔다. 그것이 자신을 향해 내리쳐오는 걸 끝까지 주시하며 시문은 두 팔을 앞으로 돌려 막았다. 정신을 집중해, 자신 안에 잠든 푸른 뇌전의 힘을 끌어냈다.
뇌전을 방패 삼아 자신을 감싸자마자, 눈앞으로 휙 하고 공간이 날카롭게 갈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폭죽이 터진 것처럼 시야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바람에 휩쓸린 나무토막처럼 시문은 뒤로 덜컥 날려갔다. 손 한번 못 써 본 채 무력하게 벽에 등과 뒷통수를 부딪치고, '윽' 하고 작은 소리를 흘리며 몸을 곤두세웠다. 욱신거리는 둔통이 등허리를 타고 삽시간에 뻗어갔다. 벽에서부터 죽 미끄러지듯 무너져 주저앉자, 망령의 팔이 다시 뻗어와 시문의 목을 움켜쥐었다.
딱딱한 껍질처럼 변한 손톱이 쥐어짜듯 목줄기를 파고들었다. 목이 졸린 채 시문의 몸은 인형처럼 서서히 들어올려 허공에 멈췄다. 좁아든 목 안쪽이 타는 것 같고 북소리처럼 쿵쾅거리는 맥박의 소음이 몇 겹으로 겹치고 퍼지며 관자놀이를 때렸다. 머릿속까지 터뜨릴 듯 목을 쥐어뜯으며 파들어오는 감각이 끔찍했다. "으...." 저절로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주경준은 실소하는 것 같았다. 비인간적으로 뻥 뚫린 시커먼 눈구멍. 악령. <i>키키키 키익-</i> 쇠가 긁히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그자의 목구멍에서 웃음처럼 터져나왔다.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시문의 목을 단번에 내리치려 했다. 목이 잘려나가기 직전 시문의 눈이 광채를 품고 새파랗게 번득였다.
'정신차려라, 이시문. 죽기 싫으면.' 온 힘을 끌어모은 그의 손아귀 안에서 빛이 솟아올랐다. 서로를 노린 공격은 허공에서 부딪쳤다. 시문의 손과 망령의 날 사이에서 묵직하게 어둑한 빛과 진동이 터져나가더니 시문의 몸이 또다시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 졌다. 스탠드와 원형 탁자가 시문의 몸뚱이와 함께 넘어가자 와장창 하고 요란한 소음이 일었다.
책상과 침대 사이 좁은 공간에 있는 대로 쳐박히며 이마와 팔다리가 심하게 긁혔다. 얼굴을 타고 뜨겁고 끈적이는 피가 흘러내려도 아랑곳않고, 시문은 목을 감싸며 속이 뒤집힌 듯 기침을 했다. 목구멍이 화끈거리며 벗겨진 곳에 피멍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멍청하니 머뭇거릴 틈 따위는 없었다. 시문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소리도 없이 닥쳐온 그자의 그림자. 사신의 낫처럼, 사마귀의 앞발처럼 거대하게 기형적으로 팽창한 팔과 손이 다시 시문을 향해 내리찍어 오고 있었다. 피할 여유도 공간도 없다. 욱신거리는 손목을 들어 앞을 가리면서도 시문은 늦었다, 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눈앞을 스쳐가는 얼굴은, 다른 누구도 아닌-
- 닮아가나 보네
불꽃 같은 눈으로 감추듯 웃는, 낯익은 이방인의 얼굴. 시문은 팔을 들어올리며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텐카씨.
갑자기 눈앞이 번득였다.
망령의 공격이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듯 꼼짝달싹 못 한 채 허공에서 막혔다. 그자의 손아귀 근처로 쩌적 쩌적하고 얼음이 깨지기라도 하듯 희미한 빛줄기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빛줄기는 거미줄 마냥 공기 중을 가로세로 빠르게 가로지르며 벽으로 천정으로 바닥으로, 그리고 시문을 중심으로 퍼져가더니 점차점차 하나의 거대한 금색 빛덩어리가 되어 모이기 시작했다. 시문은 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놀란 듯 고개를 쳐들었다.
부적이다. 십수 개는 될 듯한 노란 부적이 벽과 바닥에서 덕지덕지 붙은 채 강풍을 만난 듯 파르르 떨며 빛을 내뿜고 있었다. '부적? 저런 게 대체 언제?' 순식간에 머릿속에 스쳐간 의문을 곱씹어 볼 틈도 없었다. 망령은 고함을 내지르며 그 한가운데 걸려 몸을 이리저리 꺾고 있었다. 퍼석 하고 시문의 귀에 뭔가가 작게 부서지거나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번쩍, 노란 금빛으로 눈앞이 터져나갔다. 책상에 놓아뒀던 유리컵이 깨져 파편이 날리고 눈앞을 막은 시문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뒤흔들렸다. 창문이 드드드득 떨었다. 망령의 찢어지는 듯한 기이한 괴성이 고막을 먹먹하게 때렸다.
미처 그 빛이 어둠으로 사그라들기도 전에 방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박차고 들어온 텐카가 몸을 날리며 옆구리 근처에서 움켜쥔 검으로 오른손을 가져갔다. 넘실거리는 노란 불빛을 머금고 두 눈이 깊은 안쪽으로부터 예리한 살기를 뿜어올리고 있었다.
"Showtime!"
칼집에서부터 뽑혀나온 칼날이 으르렁거리는 용의 형상을 새기며 예리하게 허공을 베었다. 얼어붙을 듯한 냉기와 춤추는 칼날이 쏘는 열기가 맞부딪쳤다. 두 동강 날 만큼 깊게 잘린 망령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부적이 내뿜던 빛이 깜박거리며 천천히 꺼져들기 시작했다. 방안에 차분한 어둠이 되돌아오며 텐카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칼을 뿌려 아래로 드리우고는 우뚝 섰다. 구겨져 박힌 망령은 엉망진창이 된 방 한가운데서 바닥을 긁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텐카는 무표정하게 그 몰골을 내려다보더니 발로 그 시커먼 덩어리를 짓밟았다.
"꺼저."
시문은 벽에 등을 대고는 겨우 균형을 가늠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망령을 밟고 선 채 자신을 돌아보는 텐카와 시선을 맞췄다. "이...." 다물었던 입이 천천히 벌어지며, 버럭 고함부터 질렀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인간아!"
"엥?"
황당한 듯 눈을 치뜨다가 밑에서 몸을 뒤트는 망령 탓에 꼴사납게 뒤로 넘어가려다 겨우 버티고 서서 한번 더 망령을 밟아주고는 텐카는 '에엥?'하며 매우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머가요!"
"이 부적들요! 대체 이런 건 언제 붙여놓은 겁니까? 누가 멋대로 하랬어요. 이 인간이 진짜. 내 문제라고 일부러 안 끌어들이려고 했더니 미성년자까지 끌고 들어온 거예요?"
"흥, 그러니카 누가 혼자 맘대로 나 버리고 지방 가람니카! 텐카씨 삐져씀."
답잖게 야근했다고 새벽에 들어오는 꼴이 수상하다 했다. 시문이 자릴 비운 동안 멋대로 강바람군을 집에 끌고 와서 밑작업 다 끝마치고 그제야 남은 업무 후다닥 해치우고 왔던 거다. 본래대로라면 텐카 성격에 자기가 들어오기 전에 카세트와 워크맨을 몰래 처분하고도 남았을 텐데, 술과 초콜렛에 취한 채 방심해서 의심 못 한 게 탈이었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이글거리며 노려보는 시문 앞에서 텐카가 입을 삐죽거렸다.
"맨날 나만 미오해. 칭챤은 못 해 줄 망죵. 머찌게 등쟝해쓰니 뽀뽀 해 줄 줄 알아떠니 구박만 함니다."
"구박 안 하게 생겼습니까? 나중에 알아서 다 치워놓으시죠. 아니면 월급 감봉 당하고 시말서 폭탄 맞을 각오 하시던가."
"우와, 독재! 폭쿤! 멉니카! 기컷 두분이 알아서 잘 대화 나누시라고 방해 안 하고 기둘렸능데. 이웃집 토토로...가 아니라 두분 치고받고 대화가 굑해져도 이웃분들 피해 안 가라고 방음 부적카지 칼아주는 센스 있는 서비스 했는데!"
"아, 그러셨어요? 그 부적들 꽤 비쌀 것 같네요. 다음달 텐카씨 월급에서 까서 성황당에 지급해 드릴 테니 그리 아시죠."
억울함에 복받쳐 뭔가 더 말하려다 말고, 이제 익살은 충분했다 생각했는지 텐카는 대신 시커먼 개나 고양이처럼 웅크린 망령을 그저 한번 더 발로 찼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할까 라고 묻는 듯 시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시문은 눈짓으로 비켜주라고 신호했다. 텐카가 곧바로 뒤로 물러서자, 시문은 아직 욱신거리는 등뼈와 목의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무릎을 굽혀 주경준을 향해 몸을 굽혔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선배."
단말마의 고통처럼 꿈틀거리며, 망자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양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일그러진 얼굴은 악령화가 심하게 진행되어 이제 주경준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형상을 하고 있었다. 시문은 숨을 눌러참듯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제 가세요. 편해져도 됩니다."
할 만큼 했다는 말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몫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죽어서도 이렇게 과거의 과오를 되돌리려 몸부림치는 그를 위해서도 위안은 필요할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위로나 포용에 서투르던 자신이 어째서 살아서 상처입고 죽어서라도 보상받으려 몸부림치는 영혼들의 응어리를 들어주고 천도하는 역을 맡게 됐는지. 그러나 지금만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최대한 담담하게 다시 말했다.
"이제 가세요."
흡뜬 채 굳어가는 그 눈을 감겨주기라도 할 듯 시문의 손이 그 위로 다가갔다. 텐카가 튕기듯 어깨를 빳빳이 세웠다. "건드리지 마, 싀문...!" 시문의 손이 닿는 순간, 시커멓게 꺼져가던 그 뻥 뚫린 두 눈에 번득이는 생기가 스쳤다. <i>키이익-</i> 기분나쁜 쇳소리와 함께 망령의 두 팔이 뻗어와 또다시 시문의 목을 졸랐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텐카는 분명히 보았다. 망령이 검고 지저분한 안개처럼 흩어지며 시문의 목을 움켜쥔 손을 통해 스며들고 있는 것을. 그자는 시문에게 침투를, 정확히 말해서는 빙의를 시도하고 있었다. 텐카가 고함치며 늘어뜨렸던 칼을 다시 쳐 올렸다. 귓가까지 소름 끼칠 정도로 날카롭게 그어 내달리는 백색 칼날.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의 검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고 이제 망령의 모습은 찾을 수조차 없는데 시문은 두 팔을 떨어뜨린 채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싀문씌!"
텐카가 소리치자 급격히 시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나무로 된 꼭두각시의 줄을 거칠게 당긴 것처럼 그의 몸이 덜그럭거리며 앉은 자세에서 비정상적으로 일어나 섰다. 까딱이며 돌리는 얼굴 위에서 두 눈이 차츰차츰 붉게 물들었고, 육안으로 텐카의 존재를 확인한 듯 시선이 고정되었다. 열린 입이 갈라진 바람 소리를 내쉬다가 이윽고 주경준의 음성을 냈다.
'혼자서는, 못 간다.'
텐카의 부릅 뜬 눈이 바늘 끝처럼 굳어갔다. 살아있는 몸이 신기한 듯 팔목도 흔들어보고 다친 이마를 만져보기도 하더니 시문은 갑자기 쓱 웃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입가를 비뚤게 일그러뜨린 주경준의 웃음 그대로. 텐카는 등줄기를 스치고 오르는 오한에 이를 악문 채 몸을 떨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 형체를 갖추는 분노에 입술만 겨우 움직여 내뱉었다.
"나와."
거기서 나오라고, 이 새끼야! 고함을 지르며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주경준은 한 발 뒤로 멈칫하더니 무의식중에 손을 앞으로 내밀었고, 저절로 그 안에 푸른 빛이 서리며 그대로 텐카를 내리쳤다. 파직거리며 뻗어가는 뇌전이 텐카를 휩싸며 격한 물결처럼 그를 벽으로 내다 꽂았다. 쿵, 벽과 천장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고 텐카는 전신을 뒤흔드는 충격에 상체를 틀었다. 큭 하고 신음이 터져나오며 의식이 훅 꺼져갔다 간신히 돌아왔다. 엎어진 채 무거운 고개를 쳐들자,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시문의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자는 재미있다는 양 손을 앞뒤로 뒤집으며 중얼거렸다.
'보통 놈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대단한 힘이군. 괴물이 따로 없어.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이놈부터 쏴 버릴걸.'
텐카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경련을 일으키는 몸을 추슬러 칼을 짚고 어떻게 버티며 일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곧게 뻗은 검날을 치켜세웠다. 주경준은 빤히 그를 쳐다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더 입가를 일그러뜨려 경멸하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베려고? 이시문의 몸까지?'
"어이, 아죠씨. 이몸 특기가 칼로 썰어보리는 것 푼이라 착가카묜 섭한데. 갠히 귀신 잡는 특수반인 줄 알오? 칼은 거들 푼, 귀신 잡는 영파 졍도는 이몸도 쓸 수 있다는 소리다!"
검을 등뒤로 크게 돌린 후, 심호흡하고 텐카는 있는 힘을 다 해 모았던 기를 휘둘렀다. 금색으로 번득이는 붉은 불길이 태워버릴 듯한 기세로 포효를 내지르며 밀려나갔다. 주경준은 자기도 모르게 방어하듯 눈앞을 가로막았고, 시문의 양팔이 투둑거리며 갈라져 나갔다. 버티려 했으나 몸뚱이가 밀려나가 벽에 등이 막히고 말았다. 텐카가 히죽거렸다. 입가를 치켜 이성을 잃은 듯한 웃음을 그렸다.
"그럼 가 볼카, 2라운드."
-- 본격_부부_싸움.txt
비터 발렌타인 3편.
어렵사리 시문에게서 받아냈던 현관 키로 문을 열고 들어서다 말고 텐카는 멈춰섰다. 아무도 없으리라 여긴 집안에 부엌 조명이 밝혀져 있었던 탓이다. 노르스름한 불빛이 좁고 짧은 복도까지 백묵으로 그린 듯 옅게 흘러넘쳐 있었다. 텐카는 길죽한 눈을 치뜬 채, 손바닥으로 받치고 있던 현관문을 부러 험하게 놓아 쿵 닫히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막 들어온 마냥 구두를 덜그럭거리며 벗고 부산을 떨어 인기척을 만들어냈다.
"어~ 피곤하다. 텐카씌 오늘 야근 힘내씀니다. 밤장님이 도망가소 혼쟈 좝일해씀니다. 우리 밤장님 탱탱이 대장... 어어라?"
그는 부엌 쪽으로 불쑥 머리를 디밀고는 말꼬리를 올렸다.
"머야, 싀문씨. 지베 있어쏘? 조기 멀리카지 가따온다고 해소 내일 오는 줄 아라찌. 가떤 일 잘 대씀니카? 나픈놈 자바다 족쳐슴니카?"
시문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채 텐카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단촐한 테이블 위에 싸구려 와인병이 나와있고 벌써 반쯤 비어있는 광경에 텐카는 약간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 그가 제대로 옷을 갈아입었고 아직 머리가 덜 말라있으니 제대로 씻기도 했다는 것까지 눈으로 확인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곁으로 다가왔다. 기계적이나마 제대로 일상 사이클에 맞춰 작동하고 있다면 됐다. 시문이란 인간은 아직 괜찮은 거다. 그는 컵에 약간 남아있던 와인을 멋대로 쭉 들이키고는 평소대로 웃는 표정을 만들었다.
"보아하니 잘 안 댔그만요. 머 어떠슴니카. 살다보면 이론 일 조론 일 있는 거지. 촘 기다료. 가치 마셔줄 사람 피료하지?"
그는 코트를 벗기 전에 습관적으로 주머니 안에 든 것들을 끄집어냈다. 열쇠, 쓸데없는 영수증, 사탕봉지, 그리고 성가시다는 듯 한 웅큼 꺼내놓는 초콜렛. 상자는 버리고 속 알맹이만 주워담았는지 온갖 포장에 온갖 상표 초콜렛이 고급 수제 트러플부터 봉봉, 스퀘어, 프랄린, 초코바까지 죄 뒤섞여 테이블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시문의 눈꺼풀이 들어올려졌다. 표정없이 비어버린 컵 바닥만 응시하던 그가 그제야 텐카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이게 다 뭡니까?"
"앙, 보믄 모름니카. 단 검니다, 단 거. 머 내가 단 거 달고 다니는 거 한두 번 밨나."
시문은 잠깐 생각을 더듬었다. 비슷한 광경을 최근에도 본 것 같은데. 그러고보니 어제 아침 식탁도 텐카가 차린다고 차린 게 시리얼과 초콜렛 한 움큼이었지. 그때는 무슨 애 같은 장난인가 했는데. 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푹 찌르듯 한마디 던졌다.
"...발렌타인이라서가 아니고?"
그 자리에서 굳은 듯 텐카가 멈춰섰다. 끼기긱 기름칠 안 한 기계 소리라도 날 것처럼 얼어붙은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며 질린 눈으로 시문을 쳐다보았다. 정곡을 찔려도 너무 스트레이트로 찔렸다. 답잖게 버벅거리는 말을 던지긴 했으나 영 수습이 힘들어 보이긴 했다.
"모, 모야. 싀문씨가 그런 것도 알오? 바픈 횽사님이 'Valentinstag'도 알고 세상 말세임니다?"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받아친 건 시문 쪽이었다. 눈을 크게 뜨며 정말 아무런 악의도 없이 두번째 스트라이크를 던졌다.
"어쩌다 알았는데 왜요? 하긴, 텐카씨야 가게마다 산처럼 초콜렛을 쌓아놨으니 지나갈 때마다 하나씩 사 모았겠죠. 안 봐도 뻔하네요. 좋겠어요, 단 것들이 많아서."
그냥 너님한테는 '초콜렛이 길거리에 산처럼 쌓여있는 데이'라는 의미였냐! 가여울 만큼 축 쳐진 텐카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문은 그 많고 많은 상표와 종류조차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제일 가까이 있는 걸로 하나 집어들었다. "저녁 걸렀는데 좀 먹어도 돼죠?"
"네, 네. 너 맘대로 하세여. 밤장님인데 머." 전투불능 상태로 비척비척 옷 갈아입으러 기어가다 말고 텐카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는-먹을-만-하네'라는 표정으로 상상도 못할 고가의 파베 초콜렛을 깨물어먹은 후 다음엔 뭘 먹을까하고 그나마 먼지만큼의 관심을 갖고 고르는 시문을 돌아보았다. 텐카의 표정이 차츰 웃음기를 담았다. 늘상 짓던 만들어붙인 가면 같은 얼굴이 아닌 눈 안쪽에서 잠시 피어오르다 스러지는. 그는 일부러 놀리듯 의자 등받이에 손을 짚으며 시문의 어깨에 닿을 만큼 깊이허리를 수그렸다.
"머야, 싀문씌. 이젠 촤컬릿 잘 먹네. 전에는 달다고 실오하더니."
시문은 특별한 대꾸 없이 그저 힐긋 눈끝을 들어 텐카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렌지 리큐르가 들어간 마지판을(본인은 뭔지도 모르고 골랐겠지만) 천천히 골라 입에 넣더니,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러는 텐카씨는, 전보다 옷차림이 수수해졌네요."
그리고 혀를 내밀어 무심하게 손가락 끝을 핥았다. 텐카는 갈색 뿔테 안경과 코트 아래 입고 있던 진회색 니트와 많이 겸손해진 송치 벨트와 순은제 버클과 그 이상으로 평범한 양장 바지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입맛이 단지 쓴지 알 수 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시문의 곁을 벗어나려던 생각을 접고 식탁 의자를 끌어와 가까이 앉았다. 시문이 늘 피우던 흔한 담배 연기처럼 두서없고 잡기 힘든 음성이 흘러나왔다.
"가치 살다보니 닮아가나 보네."
초콜렛을 하나 더 고르다 말고 시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귀에 익은 말이다. 누가 또 그런 소리를 했나 싶었는데, 운전하며 고강도와 통화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i>어쩌다보니 계속 가까이 지내고, 그러면서 닮는 모양이네요.</i> 두 사람이 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또 어쩐지 우스워 시문은 입꼬리만 움직여 픽 웃었다.
텐카는 삼분지 일 조금 넘게 남은 와인을 가늠해보고서 또다시 삼분지 일을 나눠 시문의 빈 컵에 흘려냈다. "싀문씌는 마니 마셨으니카." 남은 건 병 째로 주둥이에 입을 대고 크게 한 모금.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의미없이 바라보다가 시문은 등받이에 깊숙이 기댔다. 그가 앞서 텐카가 한 말들을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긍정이라는 걸, 텐카는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서로 알면서도 물어보고 알면서도 대답 않고, 그게 편안해서 함께 할 수 있는 상대란 드물다. 애초부터 모나고 뾰족한 구석조차도 한쌍의 톱니바퀴처럼 딱 맞아들어가는 상대를 만났다는 드문 우연이 곧 위험을 의미한다는 것도 두 사람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로 경계하고 의심하면서도 놓지 못한 채 이렇게 젖어들고 물들고 닮아가면서, 새벽 두시에 껌벅거리는 초라한 보조등 아래 함께 시간을 보낸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싸구려 와인과 주머니에서 쏟아낸 초콜렛을 나눠먹고 마시고 침묵을 살에 나눠 품고 있다.
"피곤하지 아나?"
시문이 손바닥으로 눈가를 문지르는 걸 보고 문득 텐카가 물었다. 시문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오래 운전을 해서 그런지 오히려 잠이 안 오네요."
"그래서 혼자 마시고 있던 검니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는 않았다. 묻는다 해도 시문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일을 표현하는 타입이 아니라 돌려말할 테고, 텐카 역시 옆에서 보아 눈치와 짐작으로 대충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고, 질문의 타이밍을 망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으니까. 과거의 잔재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었던 간에 그냥 이렇게 돌아왔으면 된 거다. 무사히. 텐카가 다시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자신의 컵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문이 정말 툭 내던지듯 입을 열었다.
"그래요. 당신이 내 꿈에서 읽은 게 맞습니다. 그게 전부죠."
역시 알고 있었나. 텐카는 와인병 주둥이를 손끝으로 돌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만들었다. 특별히 티를 낸 적도 없고, 간단히 언급했을 뿐인데 시문은 잊지 않고 안에 담아둔 채 자신의 행동과 말을 해석하는 기준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텐카 쪽에서 시문을 낱낱이 읽어내려 관찰할 때 시문도 거울의 건너편에 있는 것처럼 똑같이 자신의 일그러진 반쪽처럼 그를 보았다는 의미다.
"모 대단한 능룍도 아니야. 애가...가 아니라 외가 촉 힘이라는데 난 반촉차리 욜등한 모지리라 잘 모르게쏘. 그냥 칼이나 휘두르는게 더 편할 푼이고."
"결국 당신도 특영반 답군요. 이상한 사람들의 모임이니까 딱 적당해요."
상관없어요, 라고 시문은 컵에 입술을 대며 반복했다. 부외자들, 보여선 안 될 것들이 보이고,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고, 들어선 안 될 것들이 들리는데 정작 들어야 할 건 들을 수 없는 부적격 종자들. 발 닿는 곳 없이 떠돌고 있다. 잠시 등을 맞댔다가는 곧 다시 흩어져 사라져야 한다. 떠도는 유령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병을 들어 시문의 잔과 맞부딪치고, 그 가벼운 행위와는 달리 허공을 쏘아보는 듯한 메마른 눈을 한 채 텐카는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 해 봐쏘?" 망령을 보는 푸른 눈의 남자와, 꿈을 읽고 해하는 이방인 남자. 텐카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좀더 평봄하게... 남들 같은 삶이 당신이나 내게도 있었을 찌 모른다고."
시문은 묵묵히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초콜렛 포장지가 덧없이 등불 아래서 색바랜 금빛 은빛으로 타들어가는 듯했다.
"수마는 갈림길 너머 어딘가에는 그런 선택찌도 있었을 수 있다고. 다만 우리가 보지 모타고 지나쳤을 푼. 너무 가늘고 조븐 길이라."
"평범한 삶...이라."
피식 웃듯 겨우 움직인 시문의 어깨에서 그림자가 떨어져 바닥의 어둠과 뒤엉켰다. 가늘고 좁은 길, 샛길이라. 한때는 그런 걸 믿었던 적도 있다. 자신은 단지 길을 잘못 들었을 뿐 곧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최후의 최후까지 서투르게나마 끈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그때 그 한방의 총성으로 깨달았다. 그런 믿음이 얼마나 어설프고 부질없었는지. 자신은 이런 나쁜 씨로 애초부터 결정되었을 뿐이라는 자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무르고 알량한 껍질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부터. 태어나면서부터? 아니면 좀더 자란 후?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아니면 그 후? 자신이 알던 자상한 할머니가 어쩌면 진짜 모습이 아니었을 지 모른다고 자각한 후부터?
몇번 째인지 모를 청문회에는 이제 사람이 사람 얼굴이 아닌 그저 눈코입의 집합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차가운 시선이나 낮은 욕설은 이제 부호에 불과했다. 짙은 남색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등을 꼿꼿이 세워 앉은 채, 이시문 형사는 처음과도 같이 마지막까지 증언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같은 상황이 와도 저는 똑같은 행동을 할 겁니다. 몇번이라도. 안 그랬으면 인질들과 주형사가, 나아가 동료 형사 경관들도 죽었을 테니까요. 아니, 제가 죽었을 겁니다.'
부정하지 말자. 남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 모든 결정은 오로지 자신이 살기 위해서였다.
평범한 삶, 그렇다면 이게 자신이 선택한 평범이다.
"텐카씨. 그렇지 않아요." 시문은 신중하게 말을 골라 한 마디씩 끊어서 대답했다.
"확실히는 몰라도 내게 그 길은 애초부터 없었고 봐도 가까이 갈 수 없었고 나중에는 아주 끊겼으니까요. 벼랑으로 변해버렸어요. 텐카씨, 당신은 늦지 않았을 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언제든지 당신 눈앞에 그 샛길이 보인다면, 그때는 주저말고 돌아서서 가요."
갑자기 텐카가 테이블을 덜컹 밀었다. 동시에 소리도 없이 일어섰다. 전등갓이 흔들리고, 길죽하게 뻗은 그림자에 묻힌 창백한 광대뼈 위에 붉은 눈이 초승달처럼 냉랭한 빛만 뿜었다. 그가 억양없이, 나쁜 농담처럼 말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시문은 자신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 너머 그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텐카는 하얗고 마른 손을 내리더니 시문의 어깨를 짚고 고개를 수그렸다. 띄엄띄엄, 시문의 귓가에 그 낮게 곤두선 음성이 들렸다. 사실은 거짓말을 했어, 라고.
"바이올린 소리, 나도 캐큿하지 않아. 밀수입, 무기라던가 약 태문에 사람 뭉갤 태마다 음악을 틀었지. 비명이 안 들리게. 푸주칸에 음악 틀어노틋이. 바이올린 콘체르토. 파가니니 브람스 바흐 모짜르트... 사람 푼만 아니라 음악도 망가트렸다. 셀 수도 없는 유산을."
그의 마른 입술이 다가왔으나 그저 시문의 귓가와 머리카락 끝만 겨우 스치곤, 피하듯 멀어져 갈 뿐이었다. 그런 것도 입맞춤이라면 충분하다. 아릿한 취기, 뜨겁고도 차가운 닿지 않은 입맞춤. 시문은 눈을 감은 채 그 모든 걸 받아들였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이군요. 우린 닮았어요."
이제는 그 꿈이 반복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단지 좀더 집요하고, 세밀해졌을 뿐이다. 직접 겪었던 당시조차 경황이 없어 깨닫지 못했던 것들, 이를테면 그때 피냄새를 싣고 끈적거리며 얼굴에 들러붙던 바람, 긴장되어 굳은 팔근육에 조여들던 양복 소매통, 눈동자가 바싹 말라 따갑던 것까지. 식은땀은 나지 않고 체온도 제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머리가 핑 돌 지경인데 입은 굳게 다물려 열리지가 않아서. 위아래로 돌처럼 딱 달라붙어서. 호흡이 불편했다. 소리도 없는 심장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뛰고 있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피투성이의 검붉은 그림자가 일어섰다. 출혈을 일으키는 옆구리를 움켜쥐고도 그의 두 눈은 충혈된 채 형형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자는 피얼룩 진 바닥을 건너 휘청휘청 다가오더니, 시문의 양옆을 에워싼 동료 형사와 경관들을 떠밀쳤다. 권총을 넘기고 무방비 상태인 시문을 향해 주먹이 날아들었다. 피할 틈도 없었을 뿐더러 피할 생각도 사실 없었던 것 같다. 악을 다한 주먹을 맞는 순간 어금니부터 골까지 흔들렸다. 다물려있던 입이 겨우 벌어지며 응어리처럼 뭉쳐있던 숨을 토해놓을 수 있었다. 간신히 균형을 잃지 않고 버텨서자 두번 세번 주먹이 더 날아들었다.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나 싶었다. 경관들은 건성으로 그자를 붙들어 떼어 놓았다. 주경준은 다친 맹수가 날뛰듯이 잔뜩 일그러지고 격한 얼굴로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다. 입모양은 거칠고 소리는 없었지만 시문은 그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누가 쏘랬어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은 하고 지랄이냐
내가 어떻게 해 본다고 했잖아 내가, 병신같아도 친구 새낀데, 너 지금, 사람 죽였다고!
멱살을 우악스럽게 쥐는 손길에 시문은 또다시 맞을 각오를 했다. 그러나 그 그러쥔 주먹은 그저 멱살만 몇번씩 다잡으며 부르르 떨리기만 했다. 마침내 과다출혈로 자신도 쓰러질 때까지 주경준은 움켜쥔 그 손아귀를 놓지 않았다. 시문은 구급요원들이 그를 실어가는 것을 보고, 침묵 속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앰뷸런스의 녹색 경광등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왜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까, 하고. 대답 또한 들려오지 않았다.
시문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고요하다. 꿈에서부터 이어진 것마냥 적막이 온통 달빛과 더불어 방안에 감돌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잤는데도 머리는 묘하게 깨어 있었고 살얼음처럼 곤두선 신경은 최후의 보호막이 되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시문은 소리없이 조용히 발을 내딛어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렷하게 알고 있다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오래 시간을 들여 침실문을 열어보았고, 집안이 불빛 하나 없이 어둠에 가라앉아 있는 걸, 텐카가 몸을 웅크린 채 소파에 구겨지듯 잠든 걸 확인했다.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차분히 가라앉은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차가운 유황처럼 푸르스름한 빛을 내쏘고 있었다. 업무용 노트북을 놓아둔 책상으로 다가갔다.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구식 워크맨이 또렷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문은 손을 뻗어 워크맨을 손에 쥐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어둠을 긁어 깊은 생채기라도 내듯 지직거리는 불쾌한 노이즈가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선 채 손가락만 움직여 음량을 높이니 그 신경질적인 소음 속에 가느다란 바이올린 소리가 끼어들고 있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신음 같은 현의 울림. 한참이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시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익숙한 손님을 맞이하듯 무덤덤하게.
"나오시죠. 저 혼자 있습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동안 점차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코와 목구멍 안쪽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갑자기, 달빛 속에 어두운 불길이 치솟았다. 저승에서 온 불이었다. 단지 망자의 분노와 원한, 고통만 빨아먹으며 영겁을 불타기만 하는. 시문은 천천히 돌아보았다.
예상했던 모습이 등뒤에 서 있었다. 어깨가 벌어지고 머리를 짧게 치켜깎은 젊은 남자가 지그시 고개를 들어 시문과 시선을 마주쳤다. 시문은 소리없이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보아온 분노한 망령과 하나 다를 것 없는 모습이다. 핏기나 탄력 없는 창백한 회색 피부, 구부정하게 중심이 뒤틀린 자세, 표정없이 일그러진 얼굴. 조용히 반응을 기다리니 그자가 먼저 새까만 동굴 같은 입을 뻐끔거려 말을 걸어왔다.
- 기억해 낼 거라 생각했다
시문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주경준 형사."
-- 4,5,6 편은 화이트데이 당일인 내일 마저 업로드를.
비터 발렌타인 2편
똑바로 누워 눈을 감았다. 팔을 몸 가까이 붙이고 양손바닥을 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잠이 눈꺼풀을 눌러오자마자 시문은 그 꿈이 마치 충실한 검둥개처럼 발치에 웅크린 것을 보았다. 꿈은 박쥐처럼 눅눅하고 검은 날개를 펼쳐 시문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뒤덮었다. 또다시 소리없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묵직한 총의 무게가 손에 걸리고, 막 쏘고 난 반동에 손목뼈가 울려서 아리고, 얼얼한 화약 냄새, 손가락 피부가 벗겨질 듯 뜨겁게 느껴지는 총신.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불빛들. 터질 듯 웅웅거리는 확성기와 사이렌은 목청껏 침묵의 소리를 고래고래 내지를 뿐이었다. 시문은 그곳에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리는 동료 형사들과 제복경관들이 고함 치는 동안 건물 구석에 몰려 흐느껴 울던 인질들이 패닉에 빠져 도망쳐 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시문은 발사각 아래로 천천히 권총을 늘어뜨렸다. 누군가가 곁에서 뭐라뭐라 말하며 그에게 권총 압류를 요구했다. 아직도 시문이 일그러진 손마디 안에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총을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얼굴이 흙빛이 된 고강도가 옆에서 계속 뭐라고 하고 있다. 입모양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보지 마, 시문아. 볼 필요 없다.
왜 그래야 하나? 강도의 만류야말로 별 필요없는 참견이라 느끼며 몸은 본능이랄 만큼 자연스럽게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재빠르게도 현장이 통제되고 노란 테이프가 둘러지는 중이었다. 늘 보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안타깝고 불미스러운 범죄 현장일 뿐이다.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자신이 그 자리를 만드는데 한몫 했다는 정도. 시문의 발걸음이 멈췄다. 구물거리며 바닥을 기어오는 검붉은 자국.
번질거리며 탁한 윤기를 머금은 피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강력반 형사로서 수십 수백번이나 보아온 장면 그대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숨쉬던 인간의 몸에서 유실되어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시꺼멓게 먹혀들며 굳어가는 중이었다.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는 이 장면에서 유일하게 이해하기 쉬운 강렬한 언어였다. 누군가가 우악스럽게 시문의 어깨를 잡아챘다. 조급함 속에 희미한 두려움과 짜증으로 가득 찬 손이다. 이후에 이어질 여러 사람 번거롭고 피곤하게 만들 절차를 예측한 탓에 잔뜩 성이 나고 날카로워진 여러 감정이 뒤섞인 냄새가 났다. 입모양이 말한다. 가까이 가지 말라고, 어? 또 무슨 꼴을 보자고 혼자 나대는데.
시문이 멍하니 그 입모양을 바라보는 와중 또다시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구석에서 피투성이로 뒹굴던 또다른 그림자가 휘청거리며 상체를 세우고 있었다. 몸을 가누기도 힘든 부상인데 피에 전 옆구리를 움켜쥐며 기어이 일어나 섰다. 그리고 그자는 시문이 어깨를 잡혀있는 동안 구멍 뚫린 몸뚱이로 비틀비틀 달려오기 시작했다. 목젖이 다 들여다보일 만큼 벌어진 입. 고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피투성이 남자가 굳은살 배긴 주먹을 쳐들었다. 시문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막지 않았다. 그냥 귓속에 들어찬 이 톱밥 같은 침묵이 거슬릴 뿐.
-- 이시문!
분명 그렇게 외쳤을 텐데. 여전히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마치-- 죽은 자들의 세계처럼.
꿈에서 깨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그는 깊은 물 속에서 수면으로 떠오르듯 공기와 소리로 가득 찬 현실을 호흡하기 위해 애썼다. 죽은 자들의 세계? 그런 의미였나? 불빛이 필요했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시문은 손가락으로 겉이불을 움켜쥔 채 스탠드를 켜기 위해 다른 한 손을 허공에 내뻗었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뭔가를 어둠 속에 툭 건드렸는데.
시문은 눈을 크게 떴다. 팔꿈치로 친 건 분명히, 사람 머리였다. 딱 하고 부딪친 느낌과 단단한 정도와 그 높이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노려보자 어둠 속에 흐릿하게나마 형체가 보이고 있었다. 자신의 침대 아래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세워 앉은 텐카의 뒷통수와 비죽 솟은 어수선한 머리가. 시문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체념했는지, 텐카는 여전히 무릎을 끌어안은 채 매우 뒤늦게 중얼거렸다.
"......아야."
시문은 하던 대로 손을 뻗어 스탠드를 켰고, 눈을 찌르는 불빛이 침대 주변을 밝히자마자 가늘게 찌푸린 눈으로 그자를 말없이 쏘아보았다. 텐카는 벌떡 일어나 적반하장으로 화내는 척 할까, 몽유병자인 척 할까, 능청을 떨까 본인도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듯했으나 결국 뭘 해도 시문에게 안 통할 걸 일찌감치 깨닫고는 그냥 순순히 착한 양처럼 목을 들이밀기로 최종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는 입을 비죽 내밀며 툴툴거렸다.
"왜! 나는 걱정하묜 안 댐니카. 암만 바도 선냥한 나보다는 싀문씌가 칠리는 거 많을 거 아님니카. 폭녁굥찰이니 얼마나 원한을 마니 샀게쏘."
"그래서, 살금살금 한밤에 남의 방에 들어와서 무슨 짓인데요. 소파 좁다고 시위합니까?"
"머 그것도 욜받지만! 그래도 싀문씌, 요즘 쿰자리도 사모하는... 아니, 사나운 거 가타서 그럿슴니다?"
시문은 더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조금 피곤한 꿈일 뿐이라고 여겼는데 늘 밥상머리 앞에서부터 온종일 마주보는 사람 눈에는 또 아니었나 보다. 불현듯 어떤 장면이 눈꺼풀 위로 눌러새기듯 스쳐갔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방, 미동도 없이 잠든 자신과 그의 꿈을 파수하듯 등을 대고 앉은 어둑한 그의 옆 그림자가. 가끔씩 수그렸던 고개를 쳐들어 잠든 이의 숨소리를 확인하고는 가라앉듯 본래 자세로 돌아가는. "텐카씨...."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부르려다 말고 시문은 말문을 닫았다. 이 상황에 어울리는지 아닌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단편적인 기억이 떠올랐던 탓이다. 시문은 다시 목소리를 고쳐 정색하여 말했다.
"그러고보니 텐카씨, 전에 지나가는 말처럼 들었던 것 같은데요. 당신 능력이 꿈과 관련된 거라고. 꿈이나 이미지에 접촉하는 식으로...."
"머? 쿰? 몰라여, 그게 먼데. 괜히 함밤에 캐서 배만 고파졌는데 싀문씌가 이상한 소리 해. 잠코대 함니다?"
텐카는 자연스럽게 시문의 말을 가로막았다. 긴 다리를 쭉 펴 일어나려다 말고, 오래 쭈그리고 있어서 쥐가 난 듯 발꿈치를 잡아들고 아야야야 하며 주무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시문을 돌아보는 그의 히죽 웃는 붉은 눈은 늘 그랬듯 어둠의 장막 뒤로 숨어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채색 돌처럼 빛나고 있었다. 한순간 손아귀에 잡았나 싶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뒤로 물러나 버렸다.
"어뜨케 책임져 줄 커야, 싀문씌. 몸으로 갑던가 야식집 배달 시켜쥬지 아느면 유효기간...유횰사태가 벌어질 검니다?"
그가 그렇게 벽을 친 이상 자신으로서는 그 안쪽을 비틀어 열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시문은 그간 충분히 배웠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의 곁에서 밤새 손을 뻗어 꿈을 읽어내려 했다고 해도 자신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알았다 하더라도 무엇이 변하겠는가. 어차피 자신의 몫은 자신의 몫. 정말 그가 시문의 꿈을 엿봤다 해도 그것이 오로지 시문 혼자 감당해야 할 과거 기억인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기껏 해 봤자 그 당시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책임한 위선 또는 잘잘못을 어설프게 따지는 윤리적 지적 뿐이겠지. 그러나 동정과 혐오를 위선과 지적으로 감싸 포장하는 일은 시문과 마찬가지로 텐카에게도 몹시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그나 자신이나 그런 참견에 능숙한 위인이 못 된다는 사실만이 시문에게 어렴풋한 위안이 되었다.
"응?"
시문의 무반응에 오히려 재촉하듯 텐카는 손을 들어올려 그의 턱선과 그로부터 이어진 옆얼굴을 감쌌다. 크고 굵직하고 긴 손가락이 전하는 온기가 싫지는 않았다. 그에 이어 허락을 구하듯 자신의 앞머리에 기대어오는 이마조차도. 체온과 감촉이 맞닿고, 고른 숨결이 콧날에 와 닿았다. 둘이 함께 정했던 경계를 그렇게 스스럼없이 침범하는 그의 모습은 시문에게 있어 낯설면서도 동시에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받아주지 않는 농담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고 들여다보는 붉은 눈만 어둠 속에 남은 유일한 색채인 듯 싶었다. 갑자기 시문은 더없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왜 하필 이런 밤에 그러는가. 이 사나운 밤에 옆자리에 남아있는 게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당신인가. 시문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시선을 돌려 의미없이 번들거리는 스탠드 불빛을 돌아보았다.
"전화...."
"응?"
"내 핸드폰 어디 있나요."
고강도가 오늘밤 당직이라 다행이다. 시문이 단축번호로 저장된 그의 번호에 전화를 거는 동안, 텐카는 소리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자리를 피해주겠다는 듯 쿡쿡 낮은 웃음소리만 남긴 채 거실 혹은 베란다로 나가버렸다.
"어, 시문아. 왜."
수화기 저편으로 졸음에 겨운 고강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시문은 다짜고짜 용건부터 내뱉었다.
"선배, 물어볼 게 있어요. 주경준 선배 소재지 파악됐나요?"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이름을 입에 담았으나, 듣는 입장으로서는 그렇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3년 반이나 지난 일이다. 당혹감은 한참 이어지는 수화기 너머 침묵으로 증명한 셈이다. 한참만에 잠이 확 깬 목소리로 응하는 고강도의 목소리에는 경계심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시문이 너 설마.... 아직도."
빠르게 지나치는 고속도로 변 풍경은 끝없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청묵색 산등성이와 회갈색으로 군데군데 눈을 덮어쓴 논밭만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안개가 고였다가 느리게 흩어지고 다시 고요해졌다. 새벽같이 출발한 탓에 아침은 아직도 앞서 서성거리며 짙부연 청회색 어둠만이 끈질기게 도로에서 춤추고 있었다. 시문은 블랙도 프림도 아닌 신문지 같은 맛만 나는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 도로 내려놨다. 차라리 담배가 낫겠다. 운전대를 잡은 채 손가락 새로 담배를 빼물어 한모금 뱉고나자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곁눈으로 번호만 확인한 후 핸즈프리로 통화를 연결했다.
"정말 가는 거냐?"
강도 선배였다. 시문은 문득 입맛이 써서 다시 한번 종이컵 커피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왜 진작 이걸 도로변에 쏟아붓지 않았는지 후회했다. 담뱃재나 떨면 유용할 듯 싶었다.
"네."
짧은 대꾸에 강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좀전보다는 잠이 깨고 생각도 정리했는지 또렷한 음성이었다.
"시문아, 혹시 해서 묻는 건데. 너 아직도 그 사건 신경쓰는 거니...? 아니, 미안. 표현을 잘못 했다. 당연히 신경 쓰이겠지. 네 일이니까 남이 대신 고민해 줄 수도 없는 거고."
"아뇨, 딱히 별로 신경 안 써요."
고심해서 말을 고르는 강도가 무색하도록 딱 자르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강도는 확신이 없는 듯 아직 어물거렸다.
"어, 그래도...."
"하긴 그렇죠. 남 보기엔 그림이 좀 살벌하긴 해요. 보석상 탈취범이 인질 잡고 형사도 칼로 쑤시자 멋모르는 신입이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런 스토리니까요. 사람 죽인 것도 좀 그런데 강도가-아, 선배는 대체 이름이 왜 그래갖고- 찔린 형사하고 고향 친구라 일이 더 꼬였고요. 상부에서 일 덮느라 입단속까지 겸해서 더 부서 전체를 쥐잡듯 몰았죠. 저도 참 용하네요. 그 와중에 삼년 반이나 눈치도 없이 잘 버텼어."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인데 불공평하게도 고강도를 힐난하는 듯한 투가 됐다. 그게 마음에 걸려서 시문은 좀 누그러뜨린 어조로 다시 말을 조심스럽게 이었다.
"선배... 전 정말 괜찮아요. 그때도 말했지만. 그런 걸로 신경 쓸 녀석 아니예요."
"...하긴. 넌 청문회 가서도 같은 상황이 와도 똑같이 행동하겠다고 뻣뻣하게 선언한 놈이지."
피식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가슴이 까맣게 탄 소리다. 그전에도 그후로도 이 사람좋은 인물은 계속 그랬다. 나름 고향 선배라고 혹시나 잘못될까 안절부절 못 하고 잘 되면 자기 일처럼 뿌듯해 하고. 시문도 뒤따르듯 같이 픽 소리내 웃었다.
주형사와 임채환 또한 그랬겠지-
시문은 다시 깊숙이 담배 연기를 속에 담아넣었다 반쯤 열린 창문 밖으로 뿜어냈다. 철근을 과적재한 3.5톤 대형트럭이 바로 귀옆을 스치며 덜걱거리며 콘크리트를 뭉개 달리는 굉음이 폐부까지 울렸다. 이상하게,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형사가 된 이유도 이런 사소하고도 열띤 살아있는 오감이 필요해서였는지 모르겠다. 시문은 자신이 형사건 아니건 피우던 꽁초를 그대로 창밖에 내버리며 화제를 처음으로 되돌렸다.
"그래요. 가는 길이예요. 전북 군산 맞죠? 주경준 선배하고 임채환 고향이."
"독한 놈. 하여간 한번 고집 피우면 돌아간 할매도 못 꺾는다니까. 운전이나 조심해라, 임마."
"가는 길 적적한데 말동무라도 좀 해 줘요."
"싫다, 짜식아. 미쳤냐. 밤새 당직 서고 이제 토끼같은 마누라랑 강새기 같은 새끼 기다리는 스윗 홈으로 가야지."
"선배 변했다."
잠깐 의중을 찔린 듯한 침묵이 이어지자 시문은 또 쿡쿡 웃었다.
"농담이예요. 그렇다고 또 굳긴."
"아, 이놈. 사람 간 떨어지게 하긴. 갈수록 늬 도깨비 같은 룸메만 닮고 말야."
"그러게요. 어쩌다보니 계속 가까이 지내고, 그러면서 닮는 모양이네요."
뒤에서 하이빔을 번쩍거리며 숨이 턱에 닿은 속도로 달려드는 승합차에 능숙하게 차선을 내주며 시문은 다시 무심결에 맛대가리 없는 커피를 한모금 더 들이켰다. 눈가가 먹먹한 푸른빛을 머금었다.
"맞다. 그 이상한 외국인 좀 잘 지켜보고 있어요. 그 인간이 혹시라도 우리 과 중학생에게 뭐 좀 영시해 달라고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 절대 남들이 그 물건 못 만지게 해 줘요."
"뭔데. 폭탄이라도 돼?"
"...그냥 오래 된 물건이예요. 누구나 옛날에 써봤을 그냥 공테이프. 좀 더럽고 낡은."
자신도 모르게 약간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시문은 정면을 향했다. 멀리서부터 내려온 강물이 눈 쌓인 둔덕 사이로 반짝반짝 빛났고 말라죽은 밀짚 같은 잡초들이 바람결에 일제히 누웠다 서며 나부끼고 있었다. 해는 아직도 더디게 더디게 산 뒤에서 기어오르는 중이다. 시문은 또 근거없는 허전함에 담배를 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다시 두서없이 입을 열었다.
"선배, 그거 알아요?"
"뭐가."
"저도 흘려들은 얘기라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는 그냥 속에 담아둔다. 그러면 시간이 옳고 그름을 폭로해준다. 그렇게 믿고 그에 충실하게 살았으나 언제나 예외는 있기 마련인가 보다. 그새 또 졸음에 겨운 듯한 강도의 음성을 들으며 시문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지나가는 꿈결의 이야기인 양 흘려 말했다.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꿈은 죽은 자가 보내는 메세지일 수도 있답니다."
"엉, 그래? 우우... 모르겠다. 늘 뻗어서 잤다가 자명종에 후다닥 깨는 인생이다 보니 꿈도 꿔 본 적이 없어."
"형사란 게 다 그렇죠, 뭐. 됐어요. 그냥 그렇다는 소리니 잊어버리세요."
"잊고 자시고...."
강도가 투덜대며 뭐라고 하는 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마음이 편했다. 자신을 알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몇 안 되는 사람. 그만큼 신세졌으면 됐다. 시문은 들릴 듯 말 듯 웃으며 마무리할 셈으로 말했다.
"이제 톨게이트 지나요. 밤새 저한테 시달리느라 고생했으니 들어가서 쉬세요. 전 볼일 보고 올라갈게요."
"잠깐, 시문아."
연결을 끊으려던 그의 손길이 멈칫했다. 정작 해야 할 말은 아무것도 못 했다는 듯 고강도가 빠른 속도로 맥락없이 마치 붙들기라도 하려는 듯 말을 잇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그곳 출신이라 해서 거기 가면 주선배 행방을 알 수 있단 보장은 없어. 며칠 더 기다리면 제대로 현거처를 수배할 수 있을 테니까...!"
"아뇨. 꼭 주형사 일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알아보려고요."
시문은 부드럽지만 꼭 그만큼 표정없는 얼굴로 눈을 내리깔며 통화종료 버튼 위로 손을 움직였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또 연락할게요."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으나 그보다는 종료음이 더 컸다. 시문은 벼르던 한 개피를 더 빼물며 좀더 속도를 높였다. 마침내 차갑고 울적한 2월의 백색 태양이 온 지평선을 태우며 떠오르고 있었다. 어둠이 창백한 고개를 돌려 뒤로 물러났고 하늘은 장난감 유리알처럼 혼탁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강도에게 큰소리 치긴 했지만 사실 별다른 소득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저 요즘 계속 꾸던 뒷맛 안 좋은 소리 없는 꿈에, 정체 모를 소음이 담긴 카셋트 테이프가 머릿속에서 만나 불현듯 화학작용을 일으킨 결과였을 뿐이다. 그 꿈을 꾸지 않았다면, 그 테이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시문이 이런 종류의 고약한 장난질에는 촉이 빠른 특수과 반장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그 사건들을 연결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별다른 근거도 없이 불확실한 감 하나만 믿고 혼자 내려왔을 때는 빈 손으로 돌아갈 각오도 선 상태였다. '귀신 잡는 부서' 반장 노릇하며 이런 류의 시행착오를 한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시문의 생각보다 녹록하지 않았다.
"뭐요? 임채환?"
어렵사리 연락이 닿아 연결된 지인이란 자들은 전화 통화에서부터 질색을 하며 말문을 막기 일쑤였다.
"아니, 그놈 때문에 우리도 얼마나 문초를 당했는지 아시오? 아주 치가 떨리네. 몇번이나 말했잖소. 나는 그놈 잘 알지도 못 하고, 밥 한번 얻어먹거나 형 소리 한번 들어본 적 없다고. 보소, 서울서 온 형사 양반이면 다요? 아주 그 등쌀에 그놈 온 가족친지 고향서 못 살고 뜬 지가 이태요. 그런 걸 생판 남인 내가 뭘 알겠소?"
으레 그런 식이었다. 내 바쁘다고 서둘러 끊으려는 걸 간신히 말려서 겨우 하나 더 묻는 게 고작이었다.
"그럼 주경준은?"
다급하게 내뱉는 그 이름에 상대편은 잠시 거북스러운 침묵을 지키고는 했다. 그러나 격앙된 음색을 약간 추슬러 나름 설명한다고 하는 내용물은 거진 거기서 거기였다.
"아, 그.... 서울에 거 뭐냐, 경찰청 형사과인가 있던 경준이 말이지? 걔야 좀 발랐지. 바른 놈이였어. 쯧쯔... 임채환이가 강도질하며 인질 잡고 난리통 치는 현장서 하필 마주쳤다가 배때기 징허게 찔렸다지?"
"네, 그 후에 대해 들은 게 있으십니까?"
"거, 난 몰라. 말했다시피 임채환이고 주경준이고 일가가 죄 타지로 떠 버렸다 아뇨. 임채환이가 사살된 거야 싸다 쳐도 주경준이 뭔 죄고. 내 듣기로는 크게 다쳐서 반폐인 상태로 형사 때려치고 내려와서 입원했다카던데. 그마저도 사정이 안 좋아서 어딘가 요양차 갔다가 소식불명 됐다 카드만...."
어디를 찔러봐도 비슷한 얘기 뿐이다. 시문은 황급히 끊긴 전화기 너머 삭막한 종료음만 멀거니 듣고 있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듯 바닥이 일렁이는 걸 느끼고서야 자신이 꽤 오래 공복 상태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허기보다는 욕지기가 위장 깊은 곳에서부터 쥐어짜듯 치밀었다.
'새로 태어난 셈 쳐라.'
반복되는 경위서, 조서 작성, 이름만 달리 한 위원회 혹은 공청회, 심리에서 되풀이되는 앵무새 같은 진술, 현장 검증, 처분이 내려질 때까지 강제사직과 다름없는 긴 휴직 기간, 압류된 총기류와 신분증, 압류된 이름과 자아, 강요에 의한 심리 상담.... 상담사는 공감이라고는 말라 비틀어진-그래서 사실 시문에게는 더욱 편한- 지친 표정으로 권고했다.
'이시문씨는 보기 드물게 강한 자아관을 갖고 있군요. 그렇지만 전문가로서 되도록 피해자... 아니, 인질강도범이었으니 당신에게는 범죄자였겠지만, 그자와 선배 형사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말고 접근하지도 않는 게 좋겠네요. 알아봤자 좋을 것 없잖아요? 주형사는 어차피 퇴직할 예정이니까요. 이시문씨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현장에서 일어난 일은 그 사람이 선택한 길이니.... 아니, 말이 너무 많았군요.'
경찰청 소속 상담사는 그 까끌하고 텅 빈 눈으로 의미없이 웃었다. 젊은 여자인데도 모든 기쁨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테스트 결과 이시문씨는 굳이 제가 말 붙이지 않아도 잘 추스르시겠네요. 후회 없으시죠? 그럼 됐죠. 그거면 충분해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마지막으로 건강 종합검진을 위해 하루 입원한 시문을 찾아온 금반장은 한참 말이 없었다. 졸지에 직속 부하 둘이 사고를 친 셈이라 그 또한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고초를 치르느라 한결 꺼끌한 모습이었다. 줄담배를 병실 안에서 몇 가치를 물었던 걸까. 뒤늦게 어색하게 창문을 들쳐올려 손부채를 치면서 금반장은 시문과 시선을 피하며 그냥 무겁게 그 한마디만 했다.
'새로 태어난 셈 쳐라.'
지금은 고되어도, 너만 한결 같으면 언젠가는 위에서 알아줄 거다, 라고 더듬거리며 말이 덧붙었다. 내가 이런 꼴로 위에 올라가서 뭐 합니까 하며 웃었어도 금반장의 굳은 옆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손가락 틈새로 쓰디쓴 냄새를 내며 싸구려 담배가 타 들어갔다. 발포 후 코를 마비시키던 연기처럼. 금반장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바깥만 쳐다보다, 진저리 치며 내뱉었다.
'...독한 새끼...!'
벌써 3년 반이나 지났다 한다.
산자에게도 망자에게도 짧지 않은 시간이다. 문득 시문은 복잡한 상념에서 꺠어나 고개를 쳐들었다. 뚜르르륵, 이어지는 통화연결음에 그는 숨을 짧게 들이키며 정신을 차렸다.
관계자 대부분이 번호도 바꾸고 심지어 주소도 바꿔버려 얼굴 마주하기 힘든 이 와중에 그나마 연결되는 전화가 남아있다는 자체가 희망적인 신호였다. 이게 누구였더라. 급하게 메모를 확인하다 말고 시문은 시선을 멈췄다. 여자 이름이다. 두 사람과 잘 알고 지내던 동창 중에서도 정말 드문 여자. 그렇다면 혹시. 심리상담사의 권유로 끊어냈던 그들에 대한 단서를 3년이 넘은 지금 와서야 본의 아니게 연결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동공이 커지고 심박수가 조금 빨라지는 걸 느끼며 시문은 등을 곧게 폈다. 곧이어 차분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누구세요."
"이소미 씨 맞습니까?"
몸에 배인 형사의 말투를 그쪽에서 냄새 맡은 것 같다. 잠깐 틈을 두고, 경계를 세운 조심스러운 음성이 또박또박 뒤이었다.
"네... 맞는데요. 그쪽은 누구시죠?"
천천히 말을 돌려 핵심에 접근해 갈 여유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시문은 반사적으로 그 3년 간 속에 묵혀두고 있던 질문을 고스란히 끄집어내고 말았다.
"이시문 형사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곧바로 여쭤보겠습니다. 안나현씨 기억하시죠? 임채환씨 약혼녀였던. 그분과 친구시라고 들었습니다...."
연결고리가 하나 더 늘어난다고 기실 달라질 건 없었다. 심연은 깊고도 넓은데, 그 새까만 핵심을 향해 드리워진 사다리가 길어봤자 얼마나 가겠는가. 그럼에도 이소미라는 여자는 순순히 만나자는 청에 응했고 그것만으로도 시문은 암흑의 입구를 헛되게 비출 수 있는 등불을 손에 넣은 셈이었다.
시내에서도 구석진 낡은 다방에서 만난 이소미는 전화 음성을 판에 박은 듯이, 지친 회색 느낌이 나는 평범한 30대 중반 여인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비교적 솔직하고도 담백하게 시문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을 했다.
"그래요. 사실 누가 봐도 불행한 결합이었죠. 허풍 세고 노름질, 도벽에만 도가 튼 건달,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 남자 하나만 보고 사는 여자. 빤한 것 아니겠어요."
주경준과 임채환, 혹은 그의 약혼녀에 대해 떠오르는 대로 말해달라고 하니 그녀가 말문을 튼 첫마디는 그렇게 아픈 부분부터 꿰뚫고 있었다.
"뜯어 말렸죠. 누가 안 그랬겠나요. 아, 모르시겠구나. 나현이가 여고생 때 얼마나 이뻤는지. 성격도 좋고 착해서 얼마나 주변에서 사랑받았는지. 왜 그런 애가 그따위 싸구려 연애에 취했는지 지금도 알 길이 없어요. 틈만 나면 말했지요. 괜찮다, 서울 간 형사 친구가 그 사람 잡아줄 거다. 채환이도 곧 정신차릴 거다. 올라가서 형사 친구랑 같이 자취하면서 장사하면서 터 잡고 자길 부를 거라고."
한참 말이 없었다. 색바랜 커피숍 창밖으로 내다보는 눈길이 멀건하다. 문득, 그때 그 공허해보이던 여자 상담사라면 오히려 이 여자에게 더 관심이 쏠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튼 잡념이다. 시문은 피식 웃으며 고속도로 휴게소 자판기 커피보다 못한 시커먼 맹물을 한모금 마셨다. 이소미라는 여자가 갑자기 말했다.
"잠깐 나가서 걸을까요."
하천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좁은 개울 위에는 번듯한 다리가 놓여 삼삼오오 사람들이 오가고 자전거가 벨차임을 울리며 행인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동지와 입춘도 지났건만 2월의 겨울 오후는 짧다. 벌써 햇빛에 붉은 기가 돌며 그림자가 길게 흐느적거리며 기묘한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개울에서 불어오는 이끼 냄새가 묻어 있었다. 어릴 때 시골에서 익숙하던 유년의 향취라 시문은 깊게 심호흡하며 알싸한 겨울 막바지의 공기를 들이삼켰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영원히 침묵할 것 같았던 그 여자가 다시 불쑥 말을 이었다.
"결혼할 거라고 했어요."
돌다리 한가운데 멈춰서서 난간에 손을 짚은 채 이소미는 곰곰히 3년 넘게 묵은 기억을 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엉클어진 기억의 실타래는 오래 잊혔던 만큼 한번 풀리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오는 듯했다. 최소한 시문이 이해한 바로는 그랬다.
"오늘이 며칠이죠? 12일? 2월 12일, 13일 그 정도 아니었나요? 옛날에 나현이가 결혼할 거라면서 그랬어요. 기왕이면 발렌타인의 신부가 되고 싶다고.... 우습죠. 걔가 원래 그런 면이 있었어요. 편부 슬하에서 힘들게 자라서 그런지 남들 보기엔 낯부끄러운 낭만이라던가 행복에 집착했어요. 그래서 더 그 못되먹은 남자에게 못 헤어났지 싶지만서도. 그런데 말이죠. 겉보기로는 저도 속았어요. 정말 부러울 지경이었거든요. 안나현... 나현이가 중학생 때부터 예쁘장했다고 말했죠? 그래서 주경준하고 임채환이 놓고 다투다가 주경준이 깨끗이 포기하고 서울로 갔단 소문도 있어요. 제가 봐도 그런 것 같더라고요."
시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그녀의 과거 속에서 풀려나와 격류에 휩쓸리는 감정의 실타래에 제지를 걸 필요는 없었다.
"임채환이가 강도짓하다 인질 잡았을 때 주경준이 굳이 나서서 칼받이 했다죠. 왜 그랬을까. 임채환은 죽어 마땅했어요. 주경준도 거기서 그만 뒀어야 했는데. 퇴원하고 자기도 멀쩡한 몸이 아니면서 안나현에게 갔대요. 죽은 임채환 대신 끝까지 돌봐주겠다는 약속을 했다나.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하시겠지만 진짜예요. 제가 나현이 남동생에게 직접 들은 얘기니까. 남동생 말하길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겠다더만요. 그게 무슨 망신살이냐고요."
"그래서, 주형사가 사직하고 여기 내려와서 안나현씨를 데려갔다는 겁니까?"
"네, 맞아요. 지병까지 발작해서 시체 같은 꼴이 되서는 고집을 피우더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나현이가 몰골이 성했느냐 그것도 아닌데. 생각해봐요. 약혼자가 강도짓하다 죽고 옛 남자친구도 반폐인이 되어 버렸잖아요. 그게 한꺼번에 일어났다고요."
한꺼번에, 총알 한 방에. 시문은 무감각하게 생각했다.
바로 이 손으로.
말하다 보니 오래 죽이고 있던 감정의 도화선이 한꺼번에 불붙었는지 그녀의 음성이 점점 더 격앙되고 있었다.
"그 뒤는 묻지 마세요. 저도 몰라요. 주경준도 재활치료해야 하는 몸인데 도망쳐 나와서 나현이를 데리고 숨었대요. 그리고 소식이 없대요. 나현이까지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도 들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요? 내가 더 알아야 하나요?"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이소미는 얼굴을 가렸다. 천천히 키가 줄어들기라도 한 듯 무릎에서부터 주저앉으며 작게 아주 작게 시문 앞에 웅크렸다. 눈물이 한 방울 돌다리 위로 뚝 떨어졌다. 억누른 웅얼거림이 목구멍 안으로 사그라들었다.
"그러니까... 왜 그 여자였어.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왜 나는...."
시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뜨문뜨문 떠가던 구름이 붉고 노란 빛을 머금으며 낙하하기 시작했다. 강물은 여전히 고요히 흐르고, 불청객처럼 선 건물에 난반사 된 녹슨 듯한 땅거미가 지평선으로 퍼지고 있었다. 자신의 몫은 자신의 몫. 괴로워하는 그녀의 몫은 그녀의 몫. 시문은 조용히,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확인하고 싶었다. 그걸 위해 이곳까지 내려왔던 거다. 뒤엉킨 수수께끼를 맞춰 줄 최후의 한 조각이다. 묵묵히 듣던 그녀는 시문이 던진 질문에 소리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가 나무라는 듯한 시문의 눈길에 겨우 말로 확인을 해 주었다.
"네, 맞아요. 말씀한 그대로예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 이소미는 달고도 쓰디쓴 옛 기억을 추회하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돌다리 너머 햇빛이 반짝거린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나현이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어요. 그 남자가 강도짓 한 것도 나현이 음악 학원 차려주겠다고...."
-- 모님이 보시고 '선배 변했다' 이 대사가 아침 불륜드라마 같다고 하셔서 대뿜.
-- 특영반 연재재개 기념, 겸사겸사 화이트데이 기념으로, 3년 전 글 잠시 올려두겠습니다.
i님 리퀘로 썼던 2012년도 발렌타인 이야기입니다. 제일 마지막편은 19금이라 아마도 삭제버전을 올리거나 비번제로;;
이 이야기는 후에 특영 장편 개인지 '디아스포라'에 수록했습니다.
-- 특영반 연재재개 기념, 겸사겸사 화이트데이 기념으로, 3년 전 글 잠시 올려두겠습니다.
i님 리퀘로 썼던 2012년도 발렌타인 이야기입니다. 제일 마지막편은 19금이라 아마도 삭제버전을 올리거나 비번제로;;
이 이야기는 후에 특영 장편 개인지 '디아스포라'에 수록했습니다.
Valentine special ; Tenka X Simun)
소리가 없는 꿈을 꿨다.
시문은 권총을 받쳐든 채 꼼짝 하지 않았다. 반동 탓에 한번 크게 튀었던 손목은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고 총신은 놀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화약 냄새가 질 나쁜 싸구려 폭죽처럼 코끝을 찔렀다.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며 그를 밀치며 달려가고 있었다. 깨져나간 유리조각이 수많은 발밑에서 다시 한번 으스러져 나갔다. 멀리서 붉게 번쩍이는 경찰차의 경광등, 급히 멈춰서는 앰뷸런스, 눈에 보이는 무수한 소음.
그런데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깨끗하게 먹어치운 것처럼, 도리어 평화로운 침묵. 아수라장의 도시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시문은 무거운 권총을 발사 자세 그대로 받쳐든 채 의아해하고 있었다. 이 꿈은 언제 끝나는 걸까. 아무런 해를 끼치지도 않고 아무런 감상도 불러 일으키지 않는데 왜 계속 반복되는 걸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채. 귀가 먹먹하니 침묵에 잠긴 채. 유리벽 속에 단 홀로 갇힌 것처럼.
갑자기 몸이 털썩 위아래로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시문은 간신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개운하지 않은 선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자신의 침대 발치에 조심성없이 앉은 걸 깨달았다. 흐린 시야를 가로질러 낯익은 얼굴이 거꾸로 그를 들여다보고 있다. 빳빳하게 세운 붉은 머리에 뭐가 그리 유쾌한지 아침부터 히죽거리는 날카로운 눈. 그가 놀리는 듯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며 웃었다.
"싀문씌 조흔 아침. 잘 자씀니카?"
그 웃음과 음성이 마치 신호탄이라도 된 것 같았다. 얼어붙어 있던 시문의 머릿속 정적이 깨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댐이 무너지듯 한꺼번에 머리맡 시계가 내는 초침소리, 윗집에서 어린애들이 뛰는 소리, 밖에 틀어둔 TV 소리, 그가 들어오며 열어제친 문이 천천히 벽에 텅 하고 부딪는 소리가 귀 안쪽으로 밀려들어 왔다.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불가항력으로 덮쳐오는 일상적인 소리들. 약한 현기증에 시문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별다른 반응을 안 보이자 텐카는 부추기기라도 하듯 침대 위로 무릎을 올리며 더 은근하게 몸을 밀어붙였다.
"응? 모닝 키스 안 해 줄커야?"
시문의 고개가 그에게로 향하자마자 동시에 텐카는 그 눈이 웃으면서 푸르게 강렬한 빛을 끌어올리는 것 또한 보았다. 이미 도망치기엔 늦었다. 매일행사처럼 벼락에 얻어맞고 텐카는 새까맣게 지져진 몰골로 몸서리를 쳤다.
"아파파파파팟! 폭녁 반대! 싀문씌 야만죡이야! 모닝 키스는 못 해줄 망령 피카츄임니카!"
"아, 입이 살아있는 걸 보니 아직 기운이 넘치네요. 한대 더 맞고 영원히 누울래요, 아니면 착하게 신문이나 집어올래요?"
마치 민원 창구에서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시민을 맞는 공무원처럼 상냥하게 웃는 포커페이스로 시문이 다시 한번 손을 들어올렸을 때, 독일에서 무취업 비자로 들어와 당국의 묵인 아래 관공서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처지인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텐카 히닝콸트 씨는 머리보다 빠른 본능으로 자신의 살 길을 택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뒷걸음질로 현관까지 나가면서 그 입은 본능을 배신한 채 끝까지 떠들고 있었지만.
"누, 누가 그카지 피카츄 무서버서 피함니카! 시 신문이 보고 십슴니다. 텐카씨, 쎄울 시장님이 국토부랑 어떠케 배틀 뜨는지 공곰해서 잠도 못 잤슴니...."
시문이 흘긋 노려보자 곧 조용해진 공기 위로 현관문 닫히는 소리만 가볍게 쿵 났다. 그리고 마치 비글이 한바탕 구르고 간 마냥 담요와 방석과 옷가지가 마구 어질러진 거실을 보며 시문은 다시 한번 속으로 살의를 으득 삼킬 뿐이었다. 자기 딴에는 아침 식사라고 준비했는지 식탁 위에 1.5리터 우유와 콘 프로스트(애들이나 먹는 달디 단 설탕 범벅의), 냉동실에서 막 꺼내 해동도 안 시킨 채 팅팅 얼어있는 식빵, 초콜렛 한줌이 구르는 꼴을 보니 이젠 살의조차 부질없이 한숨으로 변할 지경이다. 자신도 별로 살아가는 절차나 의례에 신경 안 쓰는 타입이라 여겼지만 이 물건은 좀 심하다. 자신을 심판하기 위해 저런 걸 눈앞에 내려줄 필요까진 없었는데, 라고 속으로 한탄하며 시문이 말라 비틀어진 빵쪼가리를 대충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울 때였다. 현관문이 다시 달그락 열렸다.
"시문씌?"
부르는 음성이 실없이 부르는 소리가 아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텐카는 끌고 나갔던 슬리퍼를 발 뒤꿈치로 아무렇게나 벗으며 시문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내민 손에는 누런 봉투가 들려 있었다. 우체국에서 어디서나 파는 흔한 안전봉투. 그 주둥이는 뜯겨 있었다. 길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텐카는 이유없이 남에게 온 우편물을 뜯어보는 그런 위인은 아니었다. 정상적으로 온 물건이 아니란 소리다. 시문은 다가오며 짧게 물었다.
"어디서? 알 수 있나요?"
"아무것도. 문밖에 이거 하나만."
"밤새 누가 왔다간 소리라도 들었나요?"
"아뉘. 전혀."
"위험물질...은 아니었나 보군요. 사지 멀쩡한 걸 보니."
"팔다리 하나츰 날라가쓰면 싀문씌 기뽀할 텐데 그럴 수야 업지. 무게도 냄새도 소리도 별거 업서서 열어바씀니다. 메모도 업슴니다."
뭐냐고 묻는 대신 시문은 손을 내밀었다. 텐카에게 온 물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은 이상 둘 모두가 대상이며 책임이 있었다. 매우 꺼림칙한 듯, 분명 내키지 않는 얼굴로 텐카가 내민 봉투를 받아들자마자 시문이 생각난 듯 고개를 쳐들었다.
"신문은?"
다시 문이 쾅 닫혔다. 그리고 시문은 혼자 봉투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아주 잠깐 망설인 후, 손가락이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깊숙이 든 납작한 사각 물체를 건드릴 때까지.
마음이 급했다. 말도 없이 몰래 신문을 집어가려는 옆의 옆집 여자를 잡아 실랑이를 하다 말고서야, 중요한 건 지금 신문이 아니라는 점을 퍼뜩 깨달았다. 텐카는 여자의 기세등등 우악스러운 목소리를 뒤로 하고 서둘러 복도를 되돌아왔다. 현관 안에 들어서며 슬리퍼를 되는 대로 벗어 던지며 불렀다.
"싀문씌!"
시문은 커튼 사이로 희부연 햇빛이 흘러드는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잔뜩 햇살을 뒤집어쓴 채 바닥에 나뒹구는 노란 안전봉투는 마치 바위로 만든 듯 보였다. 고개 숙인 채 자기 생각 속에 갇힌 듯 두 손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의 망연한 뒷모습. 혹시 뭔가 알아낸 건가. 시문에게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나. 숨쉬기 버거울 만큼 폐가 옥죄어드는 기분으로 텐카는 손을 뻗어 시문의 어깨를 잡아챘다. 혼자 두는 게 아니었다. 머릿속이 흑백으로 하얗게 물드는 느낌. 자신의 순간적인 멍청한 실수를 질책하는 텐카가 잡아끄는 대로 시문의 고개가 뒤로 돌아왔다.
"네? 왜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올려다보는 표정에 텐카는 순식간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흐늘흐늘해져서 데친 자이언트 오징어마냥 바닥에 무릎 꿇는 텐카를 향해 시문이 또 잔소리를 퍼부을 태세를 취했다.
"또 신문 안 집어오고 대체 뭐 한 겁니까? 텐카씨 벌써 치매가...."
"치망 아님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싀문씌 대체...!"
억울한 듯 벌떡 일어나는 텐카를 말끄러미 보다가 시문이 겨우 손을 치켜들었다. "아아, 이거요?"
지저분한 카세트 테이프 하나가 그 손에 들려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더빙용 공테이프.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녹음하고 지우고 덧씌우기를 반복했는지, 라벨은 몇 겹으로 붙었다가 찢겨나가 너덜너덜하고 몸체는 온통 손때가 묻어 어디 쓰레기통이나 남의 집 벽장에 묵혀둔 걸 금방 주워온 듯한 모양새였다. 텐카는 그걸 받아들어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 보고, 겉으로 드러난 마그네틱 테이프를 햇빛에 가늠해보며 입을 열었다.
"...역시. 시문씌도 모르는 거임?"
"텐카씨도요? 하긴, 본인이 본 적 없는 물건이니 제게 확인차 넘겼겠죠."
혹시나해서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봐도 딱히 신통한 구석이 떠오르지 않는다. 시문은 바닥에 구르는 안전봉투를 몇번 째인지 모르게 다시 살피며 텅 빈 안도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저야 시골에서 자랐으니 카세트나 LP판이야 많이 봤다만서도 제 걸 가져본 적은 없었죠. 경찰청에서 자료용으로 남기는 건... 제가 들어왔을 땐 이미 디지털로 거의 전환된 상태였고. 저도 심문이나 방청 녹취는 MP3만 써 봤네요. 텐카씨야말로 짚이는 곳이 없나요?"
"아니 머... 나한테 태클 걸 정도면 가뵵게 C4나 클레이모어로 꽝~ 아파트 통채 날렸으면 날려찌. 이로케 기엽게 카... 카셋트 테이프로 고백하는 귀요미는 업슴니다 모. 회칼이라면 모를카."
"그건 그렇네요. 하긴, 저라도 그냥 길가에서 콱 쑤시고 가지 굳이 텐카씨에게 이런 에너지 낭비를 왜 하겠어요."
둘이 마주보고 하하하하 웃다 말고, 텐카가 맛이 가서 칼을 찾고 시문이 손에 전뢰를 모으며 눈싸움 한 지 몇 분. 텐카가 혀를 쯧 차며 내뱉었다.
"머 나야 쿨릴 거 업슴니다? 이론 치질한 원한이라면 싀문씌 타입임니다만?"
"아, 그러세요?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울 것 없는 해맑은 영혼이십니까?"
"아니 머.... 지은 재야 만치만 머! 머! 재를 미오하랬지 사람을 미오하랬슴니카? 싀문씌 초잔하다?"
"아뇨, 죄 말고 사람도 좀 미워하고 싶지 말입니다. 텐카씨 당신 얘기 맞습니다만."
결국 언제나 그렇듯 짐승 둘이서 으르렁 거린 끝에 무언의 휴전 제의가 오간 다음에야 각자 손을 내려놓고 조금 긴장된 분위기가 돌아왔다. 보낸 자의 정체도 의도도 짐작할 수 없는 백지 상태의 봉투. 그 안에는 사람 손을 오래 탄 듯한 더러운 카세트 테이프만 하나. 기분 탓인지 조금, 등골이 찌르르한 불쾌감이 올라왔다. 낯선 것이 낯선 맥락에 던져졌을 때 느끼는 본능적인 경계심이다. 텐카는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쓸어넘기며 당치도 않게 정석적인 해법을 내던졌다.
"그러케 신경 쓰이면, 틀어보지 그래? 알망이를 들으묜 먼지 알 거 아냐. 물런 순굘한 영혼인 텐카씌하고는 관게 업겠지만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빠른 문제 해결 앞에 가차없이 닥친 현실 앞에서, 시문이 조금 난처한 듯 혹은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카세트 플레이어만 어디서 하나 좀 주워오시죠."
자다 깨서 뜬금없이 경찰청에 호출되어 불려나온 청소년은 매우 사회에 불만이 많은 얼굴이었다. 사실 누구라도 안 그랬으랴. 성황당집 강바람군은 눌러쓴 비니 아래 더없이 험악한 눈매로 비닐봉다리로 둘둘 싼 물건을 팍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됐어요? 이런 골동품 때문에 새벽부터 사람 오라가라 하고 있어, 우씨."
"어머나, 강바람군. 학교 안 가서 팔자가 좋구나! 아침 열시가 새벽이라니 밤새 인던 돌고 있었쪄요, 우쭈쭈쭈? 뒷치기랑 먹튀도 당해쪄요?"
스*벅스 톨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들고 상큼하게 들어선 소피아의 인사 아닌 인사에 본부 안에 쌀랑한 기류가 감돌았다. 뿔난 중학생 어린이가 간이 배 밖에 라지 사이즈로 외출나온 강명자씨에게 일대일 PK를 신청했습니다. 두 사람이 신나게 전투를 벌이는 동안 시문과 텐카는 질겁을 하며 바람이가 들고 온 물건을 간신히 사수했다. 'FBI 채찍'에 맞서 분노의 부적질을 날리다 말고 바람이 목청을 높였다.
"아저씨들 그거 망가지면 알아서 해요! 저도 집구석에서 어렵게 찾아 온 거라고요! 아버지 콜렉션이라 그냥 안 넘어갈 줄 아세요."
"녜이~ 녜이~ "
들은 척 만 척 귓등으로 흘리며 텐카는 검은 비닐을 뒤집어 아무렇게나 톡톡 털었다. 족히 십오년은 묵어보이는 둔한 디자인의 워크맨이 굴러나왔다. '우와, 제법 소니 검니다!' 하고 흥이 오른 텐카가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보는 동안 시문은 양복 안주머니에 든 내용물을 끄집어내려다 말고 멈칫했다. "미안하지만." 그는 투닥거리는 소피아와 바람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잠시 자리 비켜 주겠습니까."
동시에 바람과 소피아의 움직임이 멎었다. 둘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고, 그들로부터 시선을 돌린 채 답지않게 진지한 텐카의 옆모습을 한번 본 후, 한 발짝 씩 뒤로 물러섰다. 냉정을 되찾은 소피아가 지나치게 추궁하는 어투가 되지 않도록 조절한 음성을 냈다.
"사적인 문제인가요?"
"...모르겠습니다. 아니, 공식적으로 하달 된 문제가 아니니 사적인 문제라고 보는 게 맞겠죠. 텐카씨?"
보충설명을 요구하듯 시문의 눈이 그를 향했으나 텐카는 가볍게 웃으며 그 눈길을 떨쳐내었다. 그러면서도 충실하게 말은 받아 이었다.
"그런 셈인가. 여튼 먼지 모르게찌만 싀문씌나 이몸한테 볼일이 있는 거 가트니카. 갠히 단 사람 말려들 피료 업찌."
"딴 사람 아니라고요! 나도, 아니, 우리도 특영반 요원인데 무슨 소릴!"
강바람이 발끈했으나 소피아가 소년의 입을 틀어막고 무자비한 힘으로 질질 끌어내 문가까지 갔다. 문을 닫고 나서기 전에, 버둥거리는 바람의 머리를 한대 장난 삼아 쥐어박은 후 소피아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좋아요. 그냥 넘어갈게요.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른 척 말고 바로 부르기예요?"
"웁 우웁 웁웁...!"
"어머나, 청소년도 동의한다고 하네요. 너무 위험한 짓은 말라고. 호호호, 보기보단 어른이라니까요."
'아줌마 시끄러'라고 내뱉으며 텐카는 문을 지그시 눌러 그들을 쫓아내고 문고리까지 잠가버렸다. "자." 돌아서며 텐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농담처럼 웃는 그 붉은 눈에 팽팽한 경계심이 감돌고 있는 걸 놓칠 시문이 아니었다.
"그롬 시작해 보쟈그, 밤장님."
시문이 덱을 열고 카세트를 꽂아넣는 동안, 텐카는 전선을 아무렇게나 둘둘 만 이어폰을 꺼내 잭에 끼우려다 말고 멈췄다. 원래는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서 들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고 보니 정체 모를 소리를 귓속에 가둔다는 게 찜찜할 뿐더러 그리 좋은 생각 같진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시문에게 간단히 물었다.
"스피커로?"
시문이 눈짓으로 동의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구식 워크맨을 사이에 둔 채 마주 보고 앉았다. 들이쉬는 숨소리까지 들릴 것처럼 공기가 팽팽해졌다. 손가락 끝이 축축해질 정도로. 별것 아니라 웃어넘기면서도 텐카 또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오렌지색 불꽃을 일으킬 듯 보였다. 동요를 감추려는 양 텐카는 에잇 하고 손을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가 곧바로 재생 버튼을 콱 눌렀다.
....... 그리고 이어서 의자로 펄쩍 뛰어오르며 방석을 쳐들어 얼른 얼굴을 숨겼다.
"몰라몰라, 플레이 해 버료따! 난 아무 잘못 업슴니다! 밤장님이 권룍으로 순진한 텐카씌를 희농해쏘!"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예요! 시끄러워요, 안 들리니까 좀 가만 있어봐요!"
"쟈긔가 더 큰소리묜서! 캬악, 자바가려면 욘약한 텐카씌 말고 싀문씌를 자바가세효!"
"먼저 제 손에 죽어볼래요?"
재떨이를 집어던질 것처럼 들어올리다 말고 시문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지직, 직....
긁히는 듯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테이프는 착실하게 두개의 눈구멍을 굴리며 돌아가고 있었고, 분명 침묵과는 다른 공허한 음색이, 공백이 신음하는 것 같은 노이즈가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텐카의 입이 벌어졌다. 그가 실제로 소리 내 말할 생각이 없는 걸 잘 알면서도 시문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입가에 세웠다. 조용히. 그리고 집중.
까마득하게 추락하는 기분이다. 스크라치가 들어간 올드한 영화 화면을 보는 것처럼. 지직거리는 아무것도 아닌 회색 소리. 신경을 긁는. 그 테이프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다. 아니, 침묵이 담겨있다. 귀가 먹먹해지는 공허다. 혼돈이다. 마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듯, 맨몸으로 새하얀 눈밭에 내몰린 듯, 시문은 천천히 기어오르는 한기를 느꼈다. 춥다... 춥다... 멀다... 없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뭉개져 학살당한 소리. 아득하니.
침묵.
"이게 뭐야!"
쾅 하고 텐카가 탁상을 걷어차는 굉음에 시문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한기에 얼어붙은 듯 손가락이 곱아 잔뜩 손바닥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텐카는 등을 꼿꼿이 세운 자세로 주머니에 손을 끼운 채 구둣발을 휘둘러 탁상 위 워크맨을 넘어뜨렸다. 발작하듯 지직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텐카가 여전한 무표정으로 멈춤 버튼을 누르지도 않은 채 강제로 테이프 덱을 끄집어내려다 손가락만 치이고는, 워크맨 째 벽에 집어던지려는 동작을 취했다. 시문이 그 팔을 잡아당기고서야 겨우 멈췄다. 그가 돌아보며 내뱉었다.
"악질 농담임니다! 완죤 놀림당해쏘. 갠히 촐았쟈나! 열받슴니다!"
"기다려 봐요, 텐카씨. 잠깐만!"
텐카는 워크맨을 움켜쥔 채로, 시문은 그런 그의 팔을 거두잡은 채로, 그림처럼 그렇게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십초 이십초 부질없이 시간이 흐른 끝에. 시문이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 얼음같은 푸른 눈과 굳은 턱으로 간신히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뭐죠? 들리나요, 텐카씨? 소리가...."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텐카는 그 손짓이 시키는 대로 고개를 기울여 청각을 모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손가락이 워크맨을 거듭 거머쥐었다. 희미한 소리. 노이즈 속에 섞여있다. 그도 놓치지 않았다.
창백한 묵음 속에 지직거리며 또다른 소리가, 어둠 속에 달이 떠오르듯 희미하게 섞인 게 들렸다. 아주 작고 불투명한 불청객 같은 소음. 자칫 노이즈에 지워질 만큼 가냘프게 밑바닥에 들릴 듯 말 듯 깔려 있다. 온 신경을 기울이느라 등근육이 딱딱하게 일어났다. 그 꺼질 듯한 소리의 정체는.
"바이올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짧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자각의 순간 소름이 쌔하게 돋았다. 지직거리는 굵고 기형적인 노이즈 속에서 볼륨을 최대한 줄인 라디오처럼 선율이 가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흐느끼는 듯 신경질적인 짤막짤막한 바이올린 소리. 묘하게 섬뜩한 우울한 가락. 자신도 모르게 시문은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이건 뭐지? 대체 누가? 등골을 서늘한 손가락이 하나하나 훑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쩡 하고 울렸다.
"텐카씨...!"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상대를 쳐다볼 무렵이었다. 갑자기 바이올린 소리가 튕기듯 끊기더니 또다른 소리가 끼여들었다. 나즉이 웃음소리가 퍼진다. 시문의 동공이 파르스름하게 커졌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누군가 저 건너편에 있다. 비웃는 듯 토막 난 웃음소리. 아니면 흐느낌? 바닥을 기며 긁히는 듯한 그 기분 나쁜 소리로.... 먼저 움직인 것은 텐카였다.
눈치채기도 힘들 만큼 빠른 몸놀림으로 워크맨에서 테이프를 잡아빼고, 벽에 있는 힘껏 내동댕이 쳤다. 둘 모두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게 전부라는 걸. 테이프 뒤는 공백이다. 핵심은 바로 이 바이올린 소리와 무기질적인 낮은 웃음 뿐이라는 걸. 그 짧은 동작으로도 힘에 벅찬 듯 텐카는 온 어깨로 숨을 고르며 멍하니 반공백 상태인 눈을 들어 시문을 향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을 내어 말했다.
"난 모르는 일임니다?"
시문은 자신의 손톱이 파고들어 손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긴 걸 깨달았다. 쥐가 난 듯 감각이 없는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하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생생한 그 소름끼치는 느낌. 그는 텐카에게 들려주기보다는 스스로를 추스르기라도 하듯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저도요."
시문의 머릿속이 추락하듯 희부옇게 멀어져 갔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모르고 싶습니다, 텐카씨-
-- 2편으로 계속
공개 기간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소를 받았는데 못 보신 분들은 트위터로 문의 주세요. :-) @astor19k
-- 이시문 생일기념(?)으로 괴한 이야기 하나 잠시 풀어둡니다. 텐카시문 개인지에 실었던 시문TS물인 'The Savage Beauty'와 한 셋트인 글입니다. 텐카TS 개그물이고 아직 미완성입니다. 언젠가 완성하게 되면 그때 다시 또.
-- 당연히 TS 주의.
-- 1월 20일까지만 공개 해 두겠습니다. 가벼운 개그니 즐겁게 읽어주세요!
또다시 코스모를 불태울 때까지 쉽니다.
게임일지만 남기고 전부 비공개로 돌렸습니다. 안부인사는 이곳에 남겨주세요.